
2016년 10월 18일, 필리핀 앙헬레스의 한 가정집에 경찰관들이 들이닥쳤다. 마약 단속을 명분으로 한국인 사업가 지익주 씨를 연행했다. 그는 그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필리핀 경찰청 본부인 캠프 크라메에서 살해됐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납치범이자 살인범이었다.
오늘은 그로부터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긴가. 태어난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만큼의 시간이다.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며 세상의 수많은 사건이 기억에서 사라질 만큼의 시간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에게 10년은 단순히 달력 열 장을 넘긴 시간이 아니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과 진실을 밝히기 위해 버텨온 날들이 쌓인 시간이다.
지 씨의 아내 최경진 씨에게 그 세월은 더욱 가혹했다. 남편이 이미 살해됐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납치범들이 요구한 몸값을 마련해 전달해야 했다.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건넨 돈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돈을 받은 이들은 또다시 몸값을 요구했다. 인간의 잔혹함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해외 강력범죄가 아니었다. 공권력이 범죄의 주체가 됐고, 국가기관의 시설이 범행 장소가 됐다. 시민을 보호하도록 부여된 권한이 오히려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데 이용됐다. 필리핀의 법치주의와 경찰조직에 대한 신뢰를 근본부터 흔든 사건이었다.
사법 절차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주범으로 지목된 전직 경찰 간부 라파엘 둠라오는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024년 항소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무기징역형이 선고됐으나, 형이 집행되기 전 도주했다. 필리핀 당국은 수배와 추적을 계속했고, 올해 6월 9일에야 그를 검거했다.
사건 발생 이후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주범의 신병을 확보한 것이다. 범죄 발생부터 수사와 재판, 유죄 판결 이후의 신병 관리에 이르기까지 필리핀 사법체계가 보여준 허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나마 올해 들어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지난 7월 8일 필리핀 경찰청 본부에서 지 씨를 기리는 추모비 전달식이 열렸다. 최경진 씨와 이상화 주필리핀 한국대사, 필리핀 내무부 장관과 경찰청장이 참석했다. 추모비는 준비된 부지에 영구 설치될 예정이다.
가해자가 속했던 기관에 피해자를 기억하는 추모비가 세워진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경찰조직이 스스로의 과오를 잊지 않고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모비가 과거의 잘못을 지워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추모비가 세워진 뒤 경찰조직이 얼마나 달라지느냐다.
필리핀 정부에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더 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10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사건 직후부터 유족은 낯선 나라의 사법 절차와 싸워야 했다. 언어도 법률도 다른 곳에서 수사와 재판을 지켜보고,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고, 때로는 자신의 안전까지 걱정해야 했다. 유족 측은 그 과정에서 충분한 국가적 보호를 체감하지 못했다고 호소해 왔다.
가해자가 현직 경찰이었던 사건에서 피해자 가족에게 현지 경찰의 보호를 받으라고 안내했다는 증언은 특히 돌아볼 대목이다. 일반적인 범죄 피해자 보호 절차가 공권력 범죄 앞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사건 해결을 위해 애쓴 한국 외교관과 경찰 영사들의 노력은 별도로 평가해야 한다. 제한된 권한과 어려운 여건에서도 유족을 돕고 수사기관과 접촉하며 재판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개인의 헌신이 제도의 공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재외국민을 보호한다는 말은 누구나 한다. 대사관의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자국민 보호라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정작 해외에서 국민이 살해되고 가족이 오랜 재판을 감당해야 할 때 국가가 어디까지 지원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특히 해외 강력범죄 피해자와 유족에게 필요한 법률 지원, 통역, 체류비, 긴급 신변보호 등은 사건의 성격과 현지 여건에 따라 부담이 커질 수 있다. 기존 범죄피해자 지원제도와 영사조력 체계가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포괄하는지 점검해야 한다.

한 가족이 감당해야 할 고통에 국가의 제도적 한계까지 더해져서는 안 된다.
이제 사건 10주년을 계기로 네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해외 강력범죄 피해자와 유족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현행 법률과 지원제도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법률비용과 통역비, 장기 재판에 필요한 체류비 등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별도의 특별법도 검토할 수 있다.
둘째, 영사조력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외국에서 발생한 범죄에 한국 수사기관이 직접 개입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해당 국가의 사법주권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유족에게 신뢰할 수 있는 현지 변호사를 연결하고, 수사와 재판 진행 상황을 설명하며, 위험에 처한 가족의 안전을 확보하도록 돕는 일은 더욱 체계화할 수 있다.
셋째, 한국과 필리핀의 사법공조를 강화해야 한다. 사건 발생 이후의 신속한 정보 공유와 증거 확보 협력,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의 형 집행 상황 확인까지 양국이 지속적으로 협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공권력이 연루된 범죄에서는 수사와 재판의 독립성 및 투명성을 확보하는 장치가 중요하다.
넷째, 재외국민 보호를 외교부만의 업무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법무부와 경찰, 재외공관, 국회가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고 연결해야 한다. 해외에 체류하는 국민의 안전은 외교적 편의에 따라 달라져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법과 제도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지익주 씨다.
그는 외교적 갈등을 일으키기 위해 필리핀에 간 사람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평범한 한국인 사업가였다.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고,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 이어가야 할 일상이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그 일상을 빼앗았다.
사람의 죽음은 통계가 된다. 시간이 흐르면 수많은 사건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다. 그러나 남겨진 가족에게 사랑하는 사람은 숫자가 아니다. 가족과 함께했던 목소리와 표정, 평범한 식사 한 끼의 기억까지 어느 것 하나 숫자로 환산할 수 없다.
우리는 사건 해결을 이야기할 때 주범 검거와 유죄 판결을 기준으로 삼기 쉽다. 물론 법적 책임을 묻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가족이 겪은 상실까지 법원의 판결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난 7월 추모비 전달식에서 최경진 씨는 추모비가 단순한 개인 추모를 넘어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그 말의 무게를 생각한다.
우리가 지 씨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의 이름을 오래 기억하는 것이 반드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길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잊는다면 국가가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도 함께 잊히기 쉽다.

오늘, 지익주 씨의 10주기를 맞아 두 나라 정부에 묻고 싶다.
다음에 비슷한 사건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10년 전보다 피해자를 더 잘 보호할 수 있는가. 가족이 홀로 수사와 재판을 견뎌야 하는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리고 가해자가 공권력의 일원일 때도 국가가 끝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사건은 아직 끝났다고 할 수 없다.
국민은 국경 밖에서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국가의 보호 의무 또한 국경 안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10년 전 오늘, 지익주 씨는 집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남겨진 가족은 그날 이후 10년을 견뎌왔다.
이제는 국가가 그 시간의 무게를 함께 짊어져야 한다.
지익주 씨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를 추모하는 데서 그치는 일이 아니다. 다음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제도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가 10주기에 해야 할 약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