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요구가 옳다고 판단했다”…고명승 보안사령관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계엄 반대 의사 전달

2026년 6월 6일 오후 충북 영동군 상촌면 물한계곡의 한 펜션.
민병돈 전 육군특수전사령관(예비역 중장)은 황건 교수(의사·수필가·인하대 명예교수)와 이상기 아시아엔 발행인이 함께한 자리에서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당시의 비화를 비교적 상세히 들려주었다. 그의 회고는 단순한 개인적 기억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갈림길에서 군이 어떤 선택 앞에 서 있었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언이었다.
민 장군이 당시 계엄을 막은 것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매우 중요한 결정으로 역사는 기억하고 기록할 것이다.

“비밀문서를 보고 계엄 계획임을 알았다”
민 전 사령관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에 비밀문서 한 건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시중에는 서울에 위수령이 선포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자신이 확인한 문서는 단순한 위수령 검토가 아니라 사실상 계엄령 준비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문서를 받아본 순간 “이건 나라가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광주보다 더 큰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민 전 사령관은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특전사 정보장교들을 시위 현장에 보내 직접 상황을 확인하도록 했다. 현장을 둘러보고 돌아온 장교들은 “지금은 특전사가 출동한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라며 “‘1980년 광주보다 더 큰 충돌이 벌어질 수 있다’고 보고하더라”고 말했다.
민 전 사령관은 당시 상황을 두고 “정권을 지키기 위해 무력으로 진압하느냐, 아니면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이느냐 둘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 중간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현장 보고를 받은 뒤 민 사령관은 시위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고 했다. 민 전 사령관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현장에서 들어본 정보장교들이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보고했다”며 “나 역시 국민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곧 계엄령 시행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육사 동기 고명승 보안사령관에게 대통령 설득 요청
민 전 사령관은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고명승 장군에게 연락했다. 고명승 장군 역시 같은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군 내부 분위기와 현실을 전달하고 계엄령 계획이 시행되지 않도록 건의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민병돈 장군은 당시 상황에 대해 “(계엄 명령을) 이행하면 국민에게 죄를 짓고, 이행하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이 되는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민 전 사령관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대통령께 ‘민병돈이가 그러더라’고 전하게”
민 장군은 고명승 사령관에게 대통령이 (계엄령 내리면 안 된다고 하는) 배후를 물으면 자신의 이름을 밝히라고 말했다고 한다. 민 전 사령관은 “누가 이런 주장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민병돈이라고 말하라고 했다”며 “의리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 고명승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게 관련 내용을 전달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계엄 선포 땐 전두환 대통령 신병확보 계획도
민 전 사령관은 계엄령이 실제 발동될 경우를 대비한 비상구상도 마련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전사 예하 707특수임무대대를 중심으로 대응 방안을 검토했다고 말했다.
당시 707특수임무대대장이었던 김익환 중령에게 청와대 내부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으며, 만일 계엄령이 강행될 경우 대통령의 신병을 확보하는 방안까지 고려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통령을 체포한다기보다 국가적 혼란을 막기 위해 신병을 확보하는 구상이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계엄령이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계획이 실행될 필요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결국 계엄은 시행되지 않았다
결국 계엄령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민병돈 장군은 “계엄이 시행되지 않았으니 내가 다른 행동을 할 이유도 없어졌다”며 “결과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일이 마무리됐다”고 했다.
그는 당시 군이 국민과 정면 충돌하는 상황을 피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강조했다.
“서울올림픽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민 전 사령관은 만약 계엄령이 선포됐다면 이듬해 예정된 1988 서울올림픽 개최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계엄이 시행됐다면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고 서울올림픽도 정상적으로 치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민병돈 전 사령관은 당시 계엄 준비 관련 문서가 훗날 현대사의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판단해 원본을 보관해 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건 발생 10여 년 뒤, 예편 후 한 언론인에게 문서를 보여준 뒤 원본을 돌려받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현재는 당시 확보해 둔 복사본만 보관 중이라고 말했다.
민주화의 또 다른 이면
1987년 6월 항쟁은 결국 6·29 선언으로 이어졌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길을 열었다. 민병돈 전 특전사령관의 이번 회고는 민주화 과정에서 군 내부 역시 중대한 갈림길 앞에 서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특히 군 수뇌부의 한 인사가 계엄령에 반대하고 국민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과정은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이면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평가될 만하다.
민 전 사령관은 담담한 어조로 당시를 회고했지만, 그의 증언 속에는 국가와 군, 그리고 국민 사이에서 고뇌했던 한 군인의 결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