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폰스 무하의 그림은 흔히 ‘아르누보의 화려한 젊음’으로 기억된다. 풍성한 머리카락, 유려한 곡선, 생기 넘치는 얼굴. 그러나 무하의 예술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는 단지 젊음을 찬미한 화가가 아니라 인간의 생애 전체를 집요하게 관찰한 예술가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898년의 <쇼콜라 마송 달력>과 1928년의 <미네르바 인간 생애의 알레고리 달력>은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두 달력은 모두 인간의 삶을 네 시기로 나눈다. 유년, 청년, 장년, 노년. 형식은 같지만 시선은 전혀 다르다. 1898년 작품에서 노년은 여전히 ‘보기 좋은 상태’로 남아 있다. 피부는 매끈하고 얼굴의 볼륨은 유지되며, 머리카락은 풍성하다. 늙음은 색조와 분위기로만 암시될 뿐, 주름과 처짐, 뼈의 변화 같은 생리적 흔적은 의도적으로 지워진다. 이는 소비자 친화적인 미학이자, 당시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품위 있는 노년’의 모습이다.
그러나 30년 뒤 무하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1928년의 <미네르바 달력> 속 노년은 숨기지 않는다. 관자와 광대의 꺼짐, 턱선의 후퇴, 눈가와 입가의 주름, 얇아진 모발, 굽은 등과 좁아진 어깨. 이는 이상화된 노년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의 흔적을 정직하게 받아들인 얼굴이다. 늙음은 더 이상 감춰야 할 결함이 아니라, 하나의 서사가 된다.
이 변화는 단순한 화풍의 차이가 아니다. 성형외과 의사의 시선으로 보면, 이는 미용과 윤리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왜 늙음을 숨기려 하는가. 언제부터 아름다움은 젊음과 동일시되었는가. 1898년의 무하는 오늘날 ‘안티에이징’ 산업과 닮아 있다. 주름을 지우고, 볼륨을 채우고, 시간을 되돌리려는 시도. 반면 1928년의 무하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늙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늙음을 존중하는 미학이다.
현대 성형외과에서도 이 논쟁은 계속된다. 기능 회복과 미용 사이, 자연스러움과 과도한 개입 사이의 경계는 어디인가. 최근 윤리 논의는 점점 한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젊어 보이게 만드는 것’보다 ‘그 사람답게 나이 들게 돕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무하의 후기 작품은 이미 한 세기 전에 그 답을 예술로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노년의 신체를 다루는 태도다. 처진 가슴, 재분배된 연부조직, 굽은 척추는 장식적 완벽함의 대상이 아니다. 대신 그것들은 살아온 시간의 기록으로 제시된다. 이때 아름다움은 형태가 아니라 의미에서 발생한다. 늙은 몸은 더 이상 소비 대상이 아니라, 이야기의 저장소가 된다.
무하의 변화는 우리 사회에도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여전히 ‘늙지 않은 얼굴’을 성공의 조건으로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주름 없는 정치인, 나이 들지 않는 연예인, 젊음을 유지해야만 존중받는 문화 속에서, 늙음은 개인의 실패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무하가 말하듯, 늙음은 실패가 아니라 완성의 한 과정이다.
예술은 의학보다 먼저 인간을 이해한다. 무하의 달력은 성형외과 의사에게도 하나의 교본이 된다.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시간이 제거된 상태가 아니라, 시간이 켜켜이 쌓인 상태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늙어서도 아름답다’는 말보다, ‘늙었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무하의 후기 작품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늙음은 지워야 할 흔적이 아니라, 존중해야 할 형식이다. 그리고 그 형식을 이해할 때, 예술도 의학도 비로소 인간을 향한다.


칼럼, 공감하고 다시 생각해보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