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녹취록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특별사면, 1962년 5월 16일 석방’이라고 간략히 적혀 있었다. 그날, 신현확은 서대문형무소 정문을 나섰다. 2년 7개월 만이었다. 그는 한동안 동숭동의 집 사랑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빡빡 깎은 죄수의 머리가 군인 같은 스포츠형 머리로 자랐다.
그해 가을, 집 마루에 놓인 전화벨이 울렸다. “청와대로 오시죠.” 대통령 비서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의 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였다. 그는 수화기를 놓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볼 일이 없는데 왜 부르는 걸까. 두 시간 후, 그는 청와대의 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 안에는 얼굴이 검고 키 작은 사람이 홀로 앉아 있었다. 박정희였다. 신문을 통해 알았을 뿐,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신 선생! 앉으십시오.” 박정희가 자리를 권했다. 그는 바로 말을 하지 않고 의자 옆 보조 탁자에 놓여 있는 담배갑을 들어 손으로 톡톡 쳤다. 담배 한 가치가 튀어나왔다. 박정희는 그걸 빼어 물며 그에게도 한 대 권했다. 그가 잠자코 받아 입에 물었다. 박정희가 담배에 불을 붙여주며 말했다.

“신 선생, 나를 아십니까?”
“모릅니다.”
“나는 신 선생을 잘 압니다. 서로 고향마을이 멀지 않은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수재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박정희는 담배를 다 피우지 않고 중간에 재떨이에 비벼 껐다. “내가 오늘 신 선생을 부른 것은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장관을 맡아주십시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했다. 박정희는 독촉하지 않고, 그가 담배를 한 대 다 피울 때까지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안 되겠습니다.” 그가 거절했다. 순간 박정희의 눈이 커졌다.
“왜 안 됩니까?”
“부정선거의 원흉이 내각에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신 선생이 무슨 일을 했다고, 뭘 어쨌다고 원흉입니까? 신 선생의 최후 진술을 녹음한 걸 내가 다 들었습니다. 그걸 들으면서 ‘이 사람과 손잡고 일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장관으로 적절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박정희는 거절하는 그를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했다. 가끔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일이었다. 그것마저 안 할 수는 없었다. 그 후 박정희는 이따금씩 불러 정국 현안에 대해 얘기를 듣기도 하고,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며 편안한 대화를 즐기기도 했다.
한 번은 박정희가 이런 말을 했다.
“무슨 이야기라도 좋으니 참고가 될 말을 해 주십시오.”
“무슨 이야기라도 좋습니까?”
“아, 그럼요.”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대통령이 돈에 관여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순수한 정치자금이라도 국민은 믿지 않습니다. 돈에 절대로 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취지는 알겠습니다. 다음은요?”
“때로는 군사쿠데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했으면 그걸로 된 겁니다. 나라는 전리품이 아닙니다. 이제 군인들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합니다.”
박정희가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말했다.
“그 말도 명심하겠습니다. 또?”
그의 눈에 순간 대통령 뒤에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이후락 비서실장이 들어왔다. 이후락은 대통령의 지시라며 정책에 구체적으로 간섭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묵묵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정책의 세부 사항까지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일이 거꾸로 갑니다. 대통령이 이렇게 지시했다는 말이 내려오면 애초에 계획했던 일의 순서가 엉망진창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이후락을 겨냥한 말이었다. 그러자 뒤에서 듣고만 있던 이후락이 불쑥 끼어들었다.
“신현확씨야 뭐, 한국 관료의 대표 보스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고방식 아니겠습니까?”
“나는 관료 출신 맞습니다. 그래서 내 판단이 그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박정희는 침묵하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세상에서는 혁명정부가 부패했다는 말들이 많이 도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패했습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어느 정도 부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정부패의 대표라고 하는 자유당 시대에 비해 최소한 열 배는 더 부패했습니다.”
뒤에 있던 비서실장 이후락이 긴장한 표정으로 숨소리를 죽였다. 박정희가 재떨이 위에 놓여 있던 반쯤 태운 담배를 눌렀다. 천천히, 힘을 주어 “그렇습니까?” 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섬뜩한 느낌이었다. “알았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을 박정희는 받아들였다. “신 선생, 다음에 장관을 제안할 땐 거절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녹취록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바라봤다.
권력 앞에서 해야 할 말을 하는 것, 듣기 싫은 말을 끝까지 듣는 것. 나는 두 개의 거대한 산을 보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