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기독교 신앙은 ‘보여주면 믿겠다’에서 ‘믿었더니 보인다’로의 전환입니다”

신명기 4장
“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신 4:15)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인지 능력은 굉장히 시각 중심적입니다. 차량마다 블랙박스를 장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통사고 발생 시에 증언 백 마디보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10초짜리 영상이 훨씬 신뢰를 줍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것’은 단순한 인지와 인식의 대상을 넘어 모종의 권위를 행사합니다. 믿음과 신앙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보여주면 믿겠다.’ ‘봤으니 믿을 수 있다.’ 이것은 인류 보편의 신앙 고백 아닌가요?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믿음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4장에서 모세가 말하는 대상은 출애굽 2세대입니다. 그들은 광야 노상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집트 전역에 내렸던 어마어마한 재앙을 경험해 보지도 못했고 홍해를 건너본 적도 없습니다. 태어나 보니 광야였고, 만나와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젖을 떼기도 전부터 봐 왔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출애굽의 감격에 대해 얘기해 주던 부모들이 있었는데, 그 부모들마저도 광야에서 다 죽었고 이제는 그들 스스로가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홀로서기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온갖 신들의 형상이 즐비한 장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선이 빼앗기면 마음도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며 믿는 위기를 맞닥뜨릴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당장 눈앞에 존재하는 것 같은 우상을 진짜 신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십계명 제2계명의 이야기를 유독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인지라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싶어 하고,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파악하기 쉬운 하나님으로 변경해서 믿는 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당신을 형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파악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보여주면 믿겠다’에서 ‘믿었더니 보인다’로의 전환입니다. 보이지 않으면 못 견디는 유아기적 분리 불안과의 결별이고,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잠깐묵상 오디오듣기)
https://youtu.be/mE8RaAFMOb8?si=jpun74SnOx5JXzI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