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국, ‘파부침주’와 ‘창조적 파괴’로 벗어나자”

사자성어 ‘파부침주’는 중국 고전 <사기(史記)>에 나오는 표현이다. 기원전 209년 전한(前漢) 시대, 항우는 진나라와의 전쟁을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장하(長河)를 건넜다. 이때 항우는 갑자기 타고 온 배를 가라앉히고, 싣고 온 솥마저도 모두 깨뜨렸다. 병사들에게는 3일치 식량만 나눠주었다. 돌아갈 배도, 밥을 지을 솥마저 없었으므로 병사들은 배수의 진을 치고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용감한 항우의 병사들은 적진을 향해 달려나갔고, 마침내 대승을 거두었다. 항우가 결행한 것과 같은 비장한 조치가 필요한 곳은 잊을 만하면 대규모 사고가 발생하는 항공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장기간 정체와 끝모를 후퇴를 거듭하는 주요 정책분야에도 마찬가지다.
거시적 차원에서 경제를 바라보면, 2025년 한국 경제성장률이 1.8%에 그칠 것이라고 정부는 전망했다. 트럼프 정부 출범으로 수출여건 악화와 국내정세의 불확실성을 이유로 든다. 한국의 출산율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2023년 합계출산율은 0.72명으로 OECD 회원국 중에서도 제일 낮은 수치이다.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에 따른 기후변화로 인한 각종 재난은 역대급 규모로 발생하고 있다. 물난리든 불난리든 단기 대응하는 정책만으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없다. 많은 정책대응 체계는 한계에 봉착해 있으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슘페터주의(Schumpeterianism)를 주목한다. 경제철학자 조셉 슘페터는 현대 경제학의 중요한 이론가인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동시대인이지만,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완전히 달랐다. 케인즈는 불황의 원인을 수요 부족에 있다고 봤으나, 슘페터는 공급 부족이라고 보았다. 기업은 혁신이 활발할 때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가 시장에 등장하고, 이를 통해 경제는 발전한다는 관점이 슘페터주의 핵심이다. 그러나 경제가 성숙기에 접어들면 기업들은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가 부족해지며, 경제는 활력을 잃게 된다. 케인즈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했고, 그를 추종하는 많은 정책당국자들은 은행 이자율을 내리고, 화폐 발행을 늘리는 금융 정책을 선호한다. 또한 세금 조정과 정부 지출을 늘리는 재정 정책으로 수요를 증가시키려 했다. 그러나 경제는 계속 하락 추세다. 2023년 기준 한국과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비슷한 현실은 놀라운 일이다. 국토면적이나 경제규모에서 수십배 차이 나는데도 말이다.
정책이 한계에 봉착하고 성장이 정체되는 이유로 필자는 관료주의를 꼽는다. 중앙에서만 기획되는 정책은 시장에서 효과를 보기 어렵다. 공무원의 순환보직제가 드러내는 역기능과 조직 이기주의가 결합하여 성장은 동력을 잃어가고 혁신은 가로막히고 있다. 과거 15년 동안 280조원의 예산을 투입하고도 되레 저출산은 가속화되는 현실에서 책임지는 조직과 공무원은 찾기 힘들다. 케인즈주의를 신봉하는 경제 관료는 엘리트로 각광받아 승승장구하지만, 연구개발 투자를 촉진시킬 혁신을 체험한 기술을 알고 현장을 경험한 관료는 소외된다.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은 케인즈식 경제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2017년 책 <경제철학의 전환>에서 기존 경제정책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했다. 변양균은 시장의 자율성과 기업의 창의성이 성장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민간과 시장 주도의 경제로의 전환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다양하다. 우선,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로막는 규제들이 있다. 공무원들이 기업과 단체가 활동할 수 있는 내용을 법률에 열거하는 포지티브 규제 시스템이 여전히 대세이다. 조세도 시장을 중앙정부 입맛대로 운영하게 만드는데 일조한다. 세입구조에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비율은 대략 7:3이다. 예산을 배분하면서 중앙 행정기관은 여전히 지자체와 기업 등 시장과 민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항우가 강을 건넌 후 퇴로를 차단하며 결단력을 보였던 ‘파부침주’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정치혼란으로 대내외적으로 엄중한 시기에 주요이슈에 적기 대응하고 국민화합을 이끌 리더십이 실종한지 오래되었다. 리더십이 부재한 공간에는 관료주의가 오랫동안 형성한 각 분야 카르텔이 점령하고 있다. 단임제로 선출된 정부 리더십도, 4년마다 선출되는 의회 리더십도 웬만한 개혁조치로는 의미있는 성과를 내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다.
솥을 깬다고 해서 검증된 정책을 폐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배를 침몰시킨다고 하는 것은 현장과 괴리된 마인드를 과감히 버리자는 이야기다. 승객의 생명과 관련된 항공 분야는 물론, 산업경쟁력을 높여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성과가 미미한 정책 패러다임은 장애물일 뿐이다. <세종실록>에 변진소화(變殄召和)라는 말이 있다. 나라 안팎의 재난을 그치게 하고 백성을 화합시킨다는 뜻이다. 임금 세종이 그런 대책을 찾으라고 과거시험에 응시한 수험생에게 제시한 문제에 나오는 표현이다.
항우가 택한 것처럼 현재 위기에서 생존과 민생을 위해 창조적 파괴를 과감히 할 수 있는 방안을 뜻있는 사람들이 고민하고 찾아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