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막 2:18)
우리는 어떤 선택 앞에서 확신이 서지 않을 때 타인을 곁눈질합니다. 남들이 다 하는 대로 따라 하면 적어도 혼자 틀리거나 뒤처질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모방 심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선택에 따라 내가 져야 할 책임을 다수의 군중에게 외주화함으로써 나의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려는 방어기제입니다.
이러한 심리가 가장 은밀하고도 치밀하게 작동하는 곳이 종교의 영역입니다. “다들 금식하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 따져 묻던 사람들의 목소리에는 ‘다수인 우리가 진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들에게 금식은 애통함의 표현이라기보다 그저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서로를 통해 확인하는 일종의 유니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했고, 관습화된 제의를 반복하며 스스로를 경건하다고 여겼습니다.
종교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길들여지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교회 생활을 좀 하다 보면 예배의 순서에 익숙해지고, 통용되는 표현과 특유의 말투를 따라 하게 됩니다. 남들이 일어날 때 일어나고, 남들이 “아멘” 할 때 함께 “아멘” 하면 우리는 손쉽게 ‘믿음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군중과 함께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문화에 대한 익숙함을 신앙심으로 착각하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길을 잃고 맙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막 3:6)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세계에 균열을 내는 예수님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유니폼과 다른 옷을 입고 설치는 꼴이 보기 싫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은 단순히 그들의 기분을 건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스템 전체를 건드렸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시스템을 무너뜨릴 치명적인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로 결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그토록 지키려 애쓰는 것이 나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보장해 주는 익숙한 교회 문화와 관습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피로 세우신 복음인지 말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덩달아 하던 모든 행위를 걷어냈을 때, 나에게는 무엇이 남게 될까요? 다들 하니까 나도 하는 건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걸 나도 하는 게 진짜 신앙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