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평등·박애’(Liberté·Égalité·Fraternité)를 외치며 왕정을 뒤엎고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한 프랑스혁명은 국민의 열광적 환호 속에 로베스피에르의 공화정을 탄생시켰다. 그렇지만 로베스피에르는 공포 정치로 독재권력을 휘두르면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정적들의 목을 단두대에서 잘랐다.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억압하는 로베스피에르 치하에서 프랑스 국민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루소의 피로 물든 손’이라는 로베스피에르의 별명은 장 자크 루소의 민주정신과 로베스피에르의 독재권력, 그 양면성을 드러낸다.

“말에 올라탄 세계정신(Weltgeist)을 보았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로이센군을 격파한 뒤 예나 시가지를 지나가는 모습을 본 철학자 헤겔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쓴 글이다.
헤겔이 나폴레옹을 ‘세계사적 개인’(Weltgeschichtliche Individuen)으로 높이 평가한 것은 프랑스혁명의 이념인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유럽 전역으로 확산시켜 봉건적 신분제와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역사의 발전을 이끄는 시대정신으로 근대 국가와 법체계의 발전을 촉진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은 민주혁명의 정신을 내걸고 왕정보다 더 권위적인 제정(帝政) 시대를 열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신분제와 귀족 특권을 폐지한 혁명의 성과를 유지하면서 나폴레옹 법전으로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원칙을 선언했지만, 유럽 각지에서 전쟁을 벌이며 자기 제국만의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에 박애의 보편적 이상은 계승할 수 없었다.
프랑스혁명의 혼란 속에 등장한 나폴레옹은 혁명의 이상을 저버리지도 않았고, 완전히 실현하지도 못했다. 민주혁명의 자유주의를 황제의 권위주의로 바꾼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아들이자 그 혁명의 종결자’라고 평가된다.
공화정 탄생과 루이 16세 처형 때 열광했던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때도 환호했다. 공화정과 제정에 모두 박수를 친 것이다. 그 군중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 선동의 정치기술이다. 프랑스 국민의 넋을 낚아챈 나폴레옹은 그 정치기술의 귀재였다. 실제와는 상당히 다른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처럼 극적인 연출로 영웅의 이미지를 만들고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독재권력은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옥죄고, 자유를 외치면서 자유를 억누른다. 그 억압을 느끼지 못하는 국민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쳐댄다. ‘민주주의의 껍데기를 쓴 신(新)권위주의’다. 지난날의 권위주의는 군사쿠데타나 독재권력을 통해 민주주의를 노골적으로 탄압했지만, 오늘날의 신권위주의는 민주주의의 겉모습을 유지하면서 ‘권력의 집중’으로 민주주의의 속살애 깊은 상채기를 낸다.
의회와 사법부는 존재하지만, 그 견제와 균형의 기능은 집중된 권력 앞에서 독립성을 잃어간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약화되고, 선거는 때마다 치러지지만 그 공정성은 의심된다.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위험은 민주주의를 폐지하는 독재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삼권분립은 공허한 이름으로만 남가는 ‘권력의 집중’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 위에서, 나폴레옹은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처절하게 숨을 거뒀다. 저들의 몰락은 외부에서 오지 않았다. 그들 자신의 오만과 권력욕이 그 원인이었다. 유배지에서 죽음의 날을 기다리던 나폴레옹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나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나의 최대의 적은 나 자신이었으니까.”
어느 사회든지 진정한 위기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온다. ‘내 편과 네 편의 갈라치기’로 서로 으르렁거리게 만드는 국민분열이 국력쇠퇴의 가장 큰 원인이다. 외적의 침입보다 더 무서운 것이 공동체의 밑동을 안에서 갉아먹는 내부분열이다. “국가는 자살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쇠망하지 않는다.” 에머슨의 슬픈 익살이다.
국민통합이 아니라 국민분열로 권력을 유지하는 정권은 결국 나라의 분열을 초래한다. 나라의 분열은 대부분 개인의 권력욕이나 특정계층 또는 집단의 이기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의회민주주의에서 여야의 대립은 당연하고 긍정적인 정치과정이지만, 그 대립이 정책의 경쟁을 벗어나 공동체의 연대의식마저 뒤흔드는 지경에까지 이르면 나라는 결국 에머슨이 말한 자살의 불행으로 달려갈 위험이 크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다. 권력의 집중, 이것이 단지 흘러간 역사 속만의 이야기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