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필자가 최근 제기된 육사 이전·통합 논란을 계기로 군의 정치적 중립성과 객관적 문민통제, 그리고 육사 공동체의 책임에 대해 성찰한 칼럼입니다. 기존 아시아엔의 관련 보도와 다소 다른 시각을 담고 있으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군과 군인의 역할, 그리고 육사의 명예가 무엇으로 지켜지는지 함께 생각해 보기 위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육군과 육사의 상징성 있는 직책을 역임한 예비역 장성들이 단체 성명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육사의 이전 및 통합 논의를 우려하는 내용이었다. 나 또한 육사를 졸업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심정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새삼 새뮤얼 헌팅턴의 저서 『군인과 국가』를 다시 펼쳤다. 헌팅턴은 민주주의 국가의 강군이 ‘객관적 문민통제’ 위에서 확립된다고 강조한다. 정치가 국가의 거시적 방향을 결정한다. 군은 철저한 정치적 중립 속에서 전문적 자율성을 발휘한다. 이때 비로소 강한 군대가 만들어진다. 반대로 군이 특정 정치세력이나 이념에 경도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군의 전문성과 국민의 신뢰는 동시에 붕괴하고 만다.
물론 현실은 완벽할 수 없다. 인간이 모인 사회이기에 갈등과 대립은 늘 존재한다. 특히 ‘군의 정치적 중립’과 ‘객관적 문민통제’의 실현 방식을 두고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논란을 겪어왔다.
과거 격동의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군의 특정 행동들이 있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국가적 생존이라는 맥락에서 나름의 역사적 의미와 공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르다. 대한민국은 세계적 수준의 국격을 갖추었다. 국민의 정치적 의식과 민주주의 수준도 고도로 성숙했다. 제도적 안정성과 국민적 합의가 공고해진 현대 민주주의 공동체다. 결코 넘지 말아야 할 법과 제도의 경계가 존재한다.
목적과 명분이 무엇이었든 불문해야 한다. 성숙한 민주사회에서 법적 절차를 우회하거나 헌법을 정면으로 들이받으려 했던 군 일각의 지난 행동들이 있었다. 이는 국민의 준엄한 분노가 임계점 너머로 폭발하게 만든 명백한 일탈이었다.
그로 인해 군 전체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심각하게 흔들렸다. 그 파장이 군의 자부심인 육사 공동체로까지 번지고 있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지금의 육사가 그 직격탄을 맞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육사 이전이나 통합 논의의 시시비비를 가리기에 앞서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이러한 논의가 시작되었는가?”
“왜 육사가 이토록 정치적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는가?”
통렬한 성찰이 필요하다. 결과만 논하는 것은 본질 회피에 불과하다. 정치권 역시 군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인이 아니다. 육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책임부터 먼저 직시해야 한다.
군의 정점을 경험한 지도자들은 예비역 신분이라 해도 상징적 존재다. 여전히 대한민국 육군과 육사의 정신을 대변한다. 따라서 그분들의 발언은 사적인 의견으로 치부될 수 없다.
이는 군 출신 정치인이나 시민단체의 목소리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의 행동은 개인의 정치적 견해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민주주의의 용광로 속에서 얼마든지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군의 상징적 요직을 거친 지도자들은 다르다. 누적된 제도적 대표성을 지닌 이들이 단체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민주사회가 경계해 온 ‘군의 정치적 개입과 중립성 훼손’이라는 우려를 다시금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
민주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가 있다. 주권자가 특정 집단의 목소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유일한 원천은 ‘국민의 신뢰’라는 도덕적 자산이다. 엄정한 성찰이 결여된 주장은 주권자의 눈에 집단 이기주의로 비칠 뿐이다.
진정으로 육사의 명예를 걱정한다면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다. 외형적인 이전을 반대하기에 앞서 군의 정치적 중립성과 객관적 문민통제의 가치를 어떻게 수호할 것인지 분명한 입장과 통렬한 자기반성을 밝히는 것이 순리다.
철저한 내부 성찰을 통해 도덕적 정당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국민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군의 정치적 중립은 현역 군인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다. 군의 최고 요직을 거친 지도자들에게는 더욱 무거운 사회적 책임으로 남는다. 군복을 벗었다고 해서 대표성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무게감 때문에 퇴역 후의 언행에는 더욱 깊은 절제와 성숙함이 요구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육사 선후배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헌신하고 있다. 우리가 목숨 바쳐 지켜야 할 대상은 특정 개인이나 파벌이 아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조국을 위해 산화한 선배들의 고결한 희생적 가치이며, 군의 명예다.
육사의 명예는 외부의 비판을 막아선다고 해서 지켜지지 않는다. 과오를 과감히 직시하고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수호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육사가 국민의 신뢰를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절제하기 때문이다. 특권을 누려서가 아니라 책임을 다하기 때문이다.
지금 육사에 필요한 것은 자위(自衛)가 아니라 성찰이다. 그것이 육사의 명예를 진정으로 지키는 길이다. 후배들과 사관생도들에게 물려줄 가장 값진 유산이라 확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