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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군체’…동일화에 맞선 인간의 저항

<군체> 포스터
[아시아엔=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한국영화학회장, <한국영화의 역사와 미래>(공저), <문화콘텐츠와 디지털콘텐츠> 등] 동일하지 않은 것들은 동일하지 않도록 그대로 두어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진화하지 않을 권리’라고 쓴다. 연상호의 <군체>는 봉쇄된 초고층 빌딩을 무대로 삼아 좀비 장르의 관습을 다시 배치한다. 영화는 두 개의 세계, 곧 현실의 세계와 감염의 세계가 한 건물 안에서 층계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는 방식을 전시한다. 두 세계는 외부와 내부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한 공간이 다른 공간을 잠식하는 속도의 차이다.

군무의 미학: 추(醜)의 안무
좀비가 무리를 이루어 움직이는 군무의 순간들은 인상적이다. 그것은 분명한 안무다. 일제히 고개를 꺾고, 벽을 타고, 같은 방향으로 쏟아진다. 카메라는 종종 위에서 그 합을 내려다보고, 음악은 박자를 받친다. 이런 장면은 좀비 액션보다 뮤지컬 영화의 군무에 더 가깝다. 영화는 그렇게 슬쩍 장르를 건너뛴다.

군무 장면의 카메라는 두 종류다. 하나는 부감이다. 무리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군무의 패턴을 도형으로 환원한다. 좀비들은 개체가 아니라 픽셀이 되고, 도형은 끊임없이 변주된다. 다른 하나는 어깨걸이 시점이다. 무리의 가장자리에 카메라가 끼어들어, 도형이 하나의 신체로 다시 분해되는 순간을 본다. 두 시점의 교차가 군무 장면의 리듬을 만든다. 우리는 부감에서 형식을 보고, 어깨걸이 시점에서 기묘한(uncanny) 전율을 느낀다.

그러나 군무는 극단에 이르는 형식미학의 결과다. 비틀린 관절, 일그러진 얼굴, 토악질하는 몸뚱이들이 한데 모인다. 그것은 추한 것들을 모아 정렬하는 미학이다. 아름다움이 부재한 자리에 형식만 살아남았을 때 발생하는, 일종의 차가운 숭고 같은 감정이 거기에 있다. 영화는 이 음화(陰畫)의 직시를 회피하지 않는다.

뮤지컬은 공동체의 기쁨을 신체의 일치로 번역하는 장르다. 다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일치는 유토피아의 약속을 형식으로 옮긴다. ‘군체’의 군무는 그런 약속을 뒤집는다. 일치된 몸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염의 일치이고, 동일화의 일치다. 뮤지컬의 형식이 살아남은 자리에서 뮤지컬의 약속은 사라진다. 기묘한 도착(倒錯)의 정동이다.

분할된 공간, 혹은 ‘방탈출’의 문법
극단의 형식에 맞서 이를 해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공간 속에서 발현된다. ‘군체’의 또 다른 형식적 선택은 공간 분할이다. 초고층 빌딩 한 채가 통째로 사건의 무대가 되지만, 그렇다고 빌딩이 곧 연속체인 것은 아니다. ‘부산행’과 달리 ‘군체’가 드러내는 수직성은 단계의 축이다. 위층과 아래층은 동등한 위협을 가진 별개의 무대다. 빌딩은 궁극적으로 탈출해야 할 함정이면서 통과해야 할 미로가 된다. 영화는 수직의 공포를 게임의 수평성으로 재배치한다.

건물은 봉쇄된 층, 좁은 통로, 비상계단, 닫힌 셔터 너머의 또 다른 층으로 나뉜다. 공간은 저마다 고유한 규칙을 가지고 있고, 생존자는 규칙을 먼저 해독해야 다음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다. 공간이 달라지면 규칙도 달라진다. 바로 ‘방탈출’ 게임의 문법을 닮았다. 인물들은 적과 싸우기 전에 먼저 공간을 읽어야 한다. 공포의 원천은 감염된 좀비 자체보다 다음 공간에 어떤 규칙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에 있다.

영화의 시간은 게임의 시간처럼 작동한다. 한 공간을 빠져나오는 순간, 앞 공간에서 통하던 전략은 무효가 된다. 인간들은 처음부터 다시 학습한다. 어떤 방에서는 침묵이 생존이지만, 다른 방에서는 침묵이 죽음이다. 어떤 방에서는 빛이 무기이지만, 다른 방에서는 빛이 표적이다. 관객은 ‘플레이어’가 된 인물과 동일한 학습 곡선을 따라간다.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아 한 팀이 된 플레이어들은 저마다의 전문성을 발휘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서사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약속 대련’이다. 왜 그 집단에 꼭 그 전문성이 살아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방탈출’은 감각의 구조다. 감염자의 생존 조건이 감각의 단계로 갱신되기 때문이다.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으로 이어지는 감각들. 한 감각이 닫히면 다음 감각이 열린다. 무대의 규칙은 어떤 감각이 적에게 노출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인물들은 그때마다 자신의 몸을 다시 학습해야 한다. 숨죽이는 법, 그림자를 다루는 법, 냄새를 지우는 법. 이 학습의 리듬이 곧 영화의 리듬이 된다. ‘방탈출’ 퍼즐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풀어내야 한다.

두 운동의 충돌, 혹은 진화하지 않을 권리
군무의 미학과 ‘방탈출’ 구조는 결국 한 가지 주제로 수렴한다. 영화는 진화하는 비인간과 진화하지 못하는 인간 사이의 긴장 위에 서 있다. 영화는 이 도식을 한 번 더 비튼다. 인간은 배우지만 진화하지 못하고, 비인간은 진화하지만 배우지 못한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결핍이 된다.

군무가 비인간의 운동이라면 ‘방탈출’은 인간의 운동이다. 군무가 합을 통해 차이를 제거하는 운동이라면, ‘방탈출’은 분절을 통과해 차이를 만들어 가는 운동이다. 영화는 두 운동을 같은 빌딩 안에서 충돌시킨다. 동일하지 않은 것들은 동일하지 않도록 그대로 두어야 한다. 이 명제는 두 운동의 충돌이 우리에게 남기는 정치적 결론이다. 감염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를 침식하지 못하도록 막아서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모든 것을 동일화하기 때문이다. ‘군체’는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형식이다. 인간이 끝내 지켜야 할 것은 진화의 속도가 아니라 진화하지 않을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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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한국영화학회장, '한국영화의 역사와 미래'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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