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룡 칼럼] 그들은 소통이 뭔지 알고 있을까?

소통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권력 이양기가 되면 싫든 좋든 국민과의 소통은 중심 주제가 된다. 더구나 불통의 이미지를 가진 위정자가 권력을 놓을 때가 되면 반사 심리로서 소통의 중요성은 강조될 수밖에 없다. 올해와 같은 정치 범람의 시기에는 소통이라는 말이 하도 많이 쓰여서 식상할 지경이다.

향후 5년간 절대 지배력을 갖는 국가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표를 얻어야 하고, 표를 얻기 위해서 정치가들(그들)은 너도 나도 국민과의 접촉 기회를 늘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부지런히 뛴다고들 말한다. 그들에게 소통은 이미 마련된 정책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설득하여 표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된다. 이쯤 되면 소통은 대중들의 심리에 호소하여 선거에 유리한 국면을 마련하기 위한 선거홍보 구호로 전락한 느낌이다.

그들이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제시된 구호로서의 소통을 말하고 있다면 그들은 소통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소통의 통로는 국민을 조작의 대상인 대중(mass)으로 보는 한 결코 열리지 않는다. 국민과의 소통 통로는 민심을 무섭게 생각하지 않고 쉽게 조작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한 결코 열리지 않는다.

소통은 대화(dia-logue)이며, 대화란 둘(dia)이 나누는 이야기(logue)를 의미한다. 곧 혼자 말하는 게 대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독백(mono-logue)이나 일방의 의사전달은 대화가 아니다. 국민을 설득의 대상이나 내 생각을 심기 위한 조작의 대상으로 생각하면 대화란 불가능하고 일방적 의사전달만이 가능하다.

진정한 대화가 되려면 쌍방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쌍방의 이야기 나눔은 상대의 이야기를 통해서 내 주장이나 입장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전제함으로써 가능하다. 대화와 소통의 통로는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는 열리지 않는 법이다. 서구 역사에서 대화의 달인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소크라테스는 결코 자기가 옳다는 걸 전제로 대화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거나 옳다고 주장하는 법이 없다. 그는, 자신은 모르지만 상대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과연 진정으로 알고 있는지를 검토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한다. 상대에게 무언가 알려주거나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로부터 배우기 위해 대화를 한다.

국민을 이끌어가기 위해, 또 국민들에게 무언가를 베풀기 위해 대화와 소통을 하고자 한다면 그건 소통의 ABC를 모르는 것이다. 국민의 생각에 의해서 그들이 내세우는 국가의 큰 틀이나 주요 정책들이 잘못될 수 있다는 걸 시인하고 민심에 따르겠다는 전제가 있어야 국민과의 소통 통로가 열릴 수 있다. 민심이 무섭다는 걸 알아야 소통의 통로가 열릴 수 있다는 말이다.

국가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대선정국에서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을 찾아본다는 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쉽지 않은 일일 것 같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짜놓은 틀이 옳다는 걸 전제하고서 대표 주자를 내세워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레이스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까지의 그들은 소통이 뭔지 모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즉 그들의 대선 레이스는 소통을 말하지만 불통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불통의 구조로 탄생한 정권은 불통의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그들은 정권을 잡은 후 법 집행, 행정력, 부의 배분을 통해 국민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조정해 왔고, 하게 될 것이다. 국민들은 국민들의 건전한 정서, 실질적인 생활세계와 유리된 이 같은 그들만의 잔치에 실망을 거듭해 왔다.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국민들이 불통의 구조를 지닌 권력 쟁취 과정과 권력 행사 시스템을 모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국민은 각자가 생각하는 바가 없지 않지만 이를 수렴할 진정한 소통의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는 시대정신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한 종합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의 비극은 자신들이 시대정신을 대변한다는 그들의 착각에 있다. 곧 그들이 생각하는 시대정신과 국민들이 생각하는 시대정신이 다르다는 데서 비극이 시작된다. 시대정신은 그들의 권력쟁취 욕구나 전략을 통해서가 아니라 민심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지금의 민심은 군림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대화할 줄 아는 위정자를 원한다. 우리의 생활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합리적 의사소통의 통로를 열어 민심의 무서움을 피부로 느끼는 열린 리더를 필요로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직장으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어느 집에서?
어느 복장으로?
무얼 타고?
어떤 직장으로?
어떤 직책으로?
무얼 하면서?
– 무엇과 접하면서
– 누굴 만나고?
– 어떤 분야에서?
동료와는 어떤 대화를 나누면서?
퇴근 후에는 무얼 하고?
– 누구와 어울리며?
– 뭔 이야기를 나누며?
집에는 몇 시에?
집에서는 어떻게 즐기고 휴식을 취하는지?
집에서 나누는 대화는?
몇 시에 자나?
몇 시에 일어나나?

One comment

  1. 사이버 세계가 전개된 후 스마트 정보시대가 도래했다. 스마트 폰은 모바일 시대의 상징이다. 우리는 눈만 뜨면 스마트 폰과 대화한다. 이른바 소통의 혁명이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삶이 화목하지도 않다. 마음이 편하지도 않다. 왜 그런가?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소통을 잘 살펴보라.
    결국 나와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의 동아리 소통으로 울타리를 치고 있지 않는가?

    원래 소통이란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주위를 보라. 우리의 소통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고 소탕하기 위해 존재하는 칼날과 같은 도구의 양상을 띠고 있다. 따라서 소통의 효과는 더 많은 불통, 고통을 낳는다.
    소통의 혁명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지렛대가 되어야 한다. 소통의 혁명은 미소 있는 교감과 섬기는 교류로 이루어져야 하고 더 나아가서 공감, 공생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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