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햇살, ‘보는’ 이야기로 찾아온 태국의 정취
태국 관광청 홍보영상…감출수록 또렷한 태국의 ‘가치’와 ‘이미지’
시공에 따라 천차만별로 자아내는 소리는 각각 고유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듣는 소리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된다고 믿는 잘생긴 서양 청년은 큰 전문가용 마이크와 녹음기를 들고 태국의 각지를 여행한다.
?“자연과 사람이 각각의 장소와 각각의 시간에 내는 소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며, 종종 소리의 높낮이와 속도는 고유의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소리는 사물을 다르게 보도록 만들지요. 저는 소리를 들을 때 나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진은 행복의 의미를 포착해 저장하는 수단이며, 사람들의 삶을 보고 관찰하는 것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는 아름다운 일본 처녀 역시 성능 좋아 보이는 카메라를 들고 태국 전역을 여행한다.
예상대로 잘 생긴 두 남녀는 우연히 마주친다. 청년은 방콕 근교 담런사두억 수상시장에서 노 젓는 소리, 떠드는 시장 아이들 소리를 녹음하고 있었다. 처녀는 같은 장소에서 물총놀이 하는 수상시장 아이, 팬티 파는 아저씨, 유람선 타고 술에 취해 춤추는 사람들의 웃음을 연신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실수로 기념품 가게 진열대를 쓰러뜨린 데다 가게 주인아줌마가 태국말로 연신 뭐라고 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어 당황한 청년 앞에 예쁜 동양처녀가 나타난다.
“‘괜찮습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고마움 그득한, 그러나 그 이상의 느낌을 잔뜩 절제한 미소를 잠시 주고받은 남녀는 각자의 길을 떠난다. 관객들은 당연히 이 잘생긴 남녀의 재회를 직감한다. 아니 갈망한다.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만나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아니면 누구나 꿈꿔봤음직한 여행지에서의 불같은 애욕(愛欲)에 대한 기대로 관객의 가슴은 차츰 부풀어 오른다.
태국 관광청에서 만든 태국여행 홍보영화 <햇빛을 듣다(Hearing the sunshine)>의 도입부다. 단아하고 정갈한 인생관, 뛰어난 외모 때문에 주인공 남녀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시선을 떼기 어려운 동영상이다.
결과적으로 홍보동영상이 된 이 영상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 홍보영상이 기자나 프로듀서, 작가, 디자이너 등 콘텐츠 제작자에게 긴요한 창작의 에너지를 줄 것 같아서다.
영상은 사람들이 태국에 왜 가야하는지를 직설화법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실제 관광홍보 영상 대부분에 담겨진 여행지의 가장 멋진 이미지나 내레이션, 아니 적어도 거기가 어딘 지조차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영상을 본 사람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그곳에 다시 가야할 것 같은 ‘가상의 추억’ 폴더가 뇌에 생성돼 있음을 느낀다.
재회할 듯 말듯 한 아름다운 청춘남녀의 여정을 숨죽여 지켜보던 관객들의 머리에 태국관광지의 이미지는 어떻게 남아있을까.
아마도 태국관광청은 영상을 만든 프로듀서에게 태국 관광지의 ‘가치’를 잘 드러내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여염집 사람들에게는 관광지의 ‘가치’를 그것의 ‘이미지’와 구분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
감독은 꽤 비싼 영상제작물 계약을 따낼 만큼 영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관광지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려 할 것인데 반해 그는 내용적으로는 물론 형식적으로도 ‘이미지’를 감춰버렸다. 대신 이야기(Story)를 전면에 내세웠다. 남녀의 만남과 원초적 이끌림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관객을 몰입시키는 기법을 썼다. 누가 몰입을 피해갈 수 있겠는가.
젊고 아름다운 남녀는 삶과 행복, 자아의 발견을 깊이 고민하는 ‘가치 지향적’ 인물이다. 외모 잘생긴 데다 깊은 사색에 빠진 젊은 남녀에게 빠져들지 않을 재간이 없다. 관광지 고유의 유서 깊은 ‘가치’는 전혀 동원하지 않았다. 독백과 대화를 통해 드러난 남녀의 가치관에 집중하도록, 시종 어떤 관광지나 유적지에도 전혀 카메라 앵글을 맞추지 않은 것이다.
그럼 이 정신 나간 감독은 도대체 어떻게 관광 태국의 가치, 그 유려한 이미지를 형상화 할 수 있었을까. 아니, 형상화 하긴 한 것일까. ‘이미지’와 ‘가치’도 전혀 부각시키지 않은 채 세상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잘생긴 남녀들의 일거수일투족만 따라다니는 카메라 앵글로 말이다.
정답은 ‘인간’과 ‘이야기’가 갖는 원초적인 힘에 있다. 가치를 드러내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설명하려고 든다거나, 미려한 이미지를 내세워 가치와 접목시키려 하지 않았다. 대신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성미가 높은 두 남녀의 인생관과 여행의 이유를 엿보게 해주면서 어떤 관객이든 소화할 수 있는 ‘가치’를 제시했다.
그렇다. 유서 깊고 기상천외하며 유려한 관광지의 미적 가치는 관객(관광객)에게 여전히 난해한 대상물일 뿐이다. 아무리 공감하고 싶어도 수백, 수천 년의 역사와 삶의 방식을 단 몇 시간 며칠 동안 공감(empathy)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감독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관광지의 ‘이미지’를 생략하고 본연의 ‘가치’대신 인간의 ‘가치’를 내세워 ‘인간(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낸 것이다. 다만, 관광지들의 이미지는 남녀 주인공의 동선 곳곳에 배경으로 배치됐다.
불상이나 숲속의 원시 고목(古木)을 등장시킬 때는 주인공 남녀의 인생관, 그와 결부된 취미활동(소리와 이미지를 채집하는 행위)들과 절묘하게 접목시켰다. 고도로 발달된 현대의 영상과 음향기술은 그 소리와 이미지가 어떤 유무형의 가치를 담고 있다고 느끼도록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더 놀라운 것은 영상이 담은 이미지가 관객의 무의식 폴더에 차곡차곡 저장된다는 점이다. 또 이미지를 통한 가치의 공감 역시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준에 이르는 것 같다. 뇌(腦)의 ‘의식계’ 폴더에 억지로 끼워 넣으려는 진부한 발상을 버리고 과감히 무의식 폴더를 생성해 그것에 저장키로 하는 한편 의식계-무의식계를 밀착시켜주는 ‘이야기’를 초강력 접착제로 사용한 것이다.
자 이제 태국에 가면 나는 청아하고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여행을 통해 깊은 사색의 결론을 검증하는 완벽한 여성이 될 것 같다. 태국에 가면 나는 나의 삶의 근본문제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벽한 여성을 만나 뜻 모를 그러나 거절할 리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아름다운 기대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자, 태국에 가지마라.
PS : ?이 영화 공짜다. 태국관광청 홈페이지에서 무료 상영한다. 로그인도 필요 없다. 아래 링크 누르면 볼 수 있다. 동영상 파일이 무려 7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