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산책] ‘문명교류학 개척’ 정수일 회고록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

정수일 회고록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


깐수 정수일, 파란만장한 88년 “후회는 없다”

분단시대의 불우한 천재···실크로드학 정립
문명교류학 개척한 세계적 학자

2003년 4월 30일 단행된 석가탄신일 특별사면. 문규현 신부, 단병호 민노총 위원장 등 1400여 명이 사면·복권됐다. 특사 명단에 특이한 사람이 포함돼 있었다.

1974년 대남 공작원으로 선발돼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필리핀 국적을 취득한 뒤 1984년 남한에 잠입해 단국대 교수로 활동한 ‘깐수’ 정수일. 1996년 검거 때까지 12년 동안 간첩 활동을 하다 적발돼 대법원에서 징역 12년 확정형을 복역하던 중 2000년 8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바 있다.

미 주간지 <뉴스위크>는 “분단시대의 불우한 천재학자,” “문명교류학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그를 평했다. 연구분야는 실크로드를 포함한 동서문명 교류사로, 중동지역 역사 및 문화인류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사면된 뒤에도 한동안 보안처분이 풀리지 않아 재판을 통해 자유로운 몸이 됐다.

그는 후반생을 살면서 번역과 저술에서 굵직한 업적을 다수 남겼다. 아랍인 ‘무함마드 깐수(Muhammad Kansu)’라는 이름으로 위장 입국, 해박한 이슬람문화 지식과 유창한 아랍어로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사학과 교수로 연구와 학생지도를 하던 중 1996년 안기부에 체포돼 구속기소됐다. 이후 간첩죄가 확정돼 4년 24일간, 1484일을 복역했다. 모범적인 수형생활과 연구 성과 및 활동이 인정돼 2000년 형집행정지, 2003년 사면복권됐다.

본명인 정수일로 2008년 설립된 한국문명교류연구소의 소장으로 왕성한 현장 연구를 해왔다. 그는 60년 전 ‘환국’ 결심으로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1963년 4월 모로코 주재 중국대사관에 근무하던 중 29세 청년 정수일은 북으로 돌아갔다.

중국 옌볜에서 태어나, 베이징대(아랍어 전공)를 졸업하고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돼 이집트 카이로대에서 공부해 외교부의 촉망받는 인재였다. 인재를 붙들려는 중국 외교부장이 극구 반대하자 정수일은 아랍어 통역으로 인연을 맺은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편지까지 보내 굳은 의지를 밝혔다. 결국 저우언라이의 승인을 얻어내 북한으로 귀국하게 된다.

미수를 맞아 출간한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에서 정수일은 ‘환국’을 삶의 주요 변곡점으로 꼽았다. 결국 ‘조국 통일사업’을 위해 1984년 남한으로 밀파까지 됐으니 말이다. 중국 외교관으로 걸을 꽃길을 외면하고, 12년 징역형의 감옥살이로 이어진 가시밭길을 굳이 걸으려고 한 까닭에 궁금증이 쏠릴 수밖에 없다.

“이역 중국에서 살아가는 30년간 나는 한시도 당당한 단군의 후예인 조선인이라는 점을 잊어본 적이 없으며, 종당에는 조국에 돌아가 헌신하고야 말겠다는 심지를 줄곧…시대와 역사 앞에 지닌 민족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그는 일제 때 만주로 흘러간 유민의 후손으로 이역 땅에서 태어났다. 북으로의 환국과 이후 대남공작원으로 ‘조국 통일사업’에 뛰어들었다 고초를 당한 뒤 2000년 풀려났다. 이후 실크로드학 정립과 문명교류학의 개척 등 학자로서 후반생을 살면서 번역과 저술에 업적을 남겼다. 전처 박광숙은 최승희의 제자로 중국 중앙가무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미안함을 금치 못해 회한으로 마음이 저린단다.

1961년 혼인해 슬하에 딸 셋을 뒀지만, 대남 공작원으로 가면서 생이별했다. 홀로 딸 셋을 키운 조강지처가 2015년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다. 사망 경위도, 정확한 기일이나 잠들어 있는 곳조차 모른다고 한다. “부족하고 매정한 남편을 저 황천에서라도 한번 맘 놓고 크게 질타해주오!”라고 뉘우침의 통곡을 내뱉는다.

남쪽으로 내려와 결혼한 부인에게도 미안하고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만시지탄의 자성과 자괴를 금할 수가 없다”고 그는 심경을 토로한다. 워낙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욱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삶이라 600페이지 두꺼운 책으로도 모자랐을 거다.

회고록에는 비록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인 삶이지만 선공후사(先公後私)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 석학 정수일의 고뇌와 삶의 역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난 12월 9일 한국의집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려 찬사가 이어졌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비롯한 세계 3대 여행기를 한글본으로 출간한 것도 큰 성과지만, 맨발로 세계 문명교류기를 전부 답사한 것이야말로 세계 최초, 최대의 여행기가 아니겠느냐.”(김정남)

그를 지극정성으로 후원한 김관용 민주평통 수석부의장도 “정수일 선생은 ‘위대한 학자이며 문화영토를 확장한 문명의 선구자'”라고 상찬했다.

정수일이 대남공작원으로 북에 보낸 문건은 거의 모두 아랍 역사 및 연구 관련 정보들이었다. 북의 지도책이 “이딴 걸 뭐 하러 보내느냐”고 짜증을 냈을 정도라고 한다.

“북의 아랍권 연구가 뒤쳐져 북의 학계가 참고하길 바라면서 보냈다.”(정수일) 북이 그에게 원한 정보는 그런 종류의 정보가 아니었을 거다. 그는 정계 동향이나 군사정보 취득이 주 목적인 간첩 활동에 부적격자였다. 북한이 아랍권과 문명교류 전공의 천재 학자를 그냥 남한에 넘겨준 셈이다.

정수일은 이란 등 중동 국가와 관계 개선에도 공을 많이 세웠고, 지금도 기여하고 있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다 수감된 후 불교에 귀의했다. 수감생활 중에도 연구와 집필을 계속했고, 번역서는 모두 옥중에서 완성했다. 2004년 사면복권 후 불교인권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1996년 안기부 체포를 거쳐 검찰로 넘겨져 기소된 뒤 법정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당시 최후진술에서 “저의 목숨보다 압수된 고대동서교류사 원고를 살려달라”고 읍소했다.

선고 직전, 공판검사는 컴퓨터 기술자와 함께 그를 불러 그가 집필해온 원고를 복원해줬다. 그는 출옥 다음 해 <고대문명교류사>란 제목으로 역저를 출간한 바 있다. 구치소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헨리 율)을 초역했고, 교도소에선 아랍-아랍어 사전만으로 방대한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완역했다.

책만 들고 좌정한 모습에 감복한 교도관들이 다른 재소자들이 잠든 밤에 복도의 불빛을 조심스럽게 올려 그의 독서와 집필을 도왔다고 한다. 아랍인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유창한 아랍어 외 필리핀 국적 취득을 위한 타갈로그어를 비롯해 11개 국어를 한다. 탁월한 외국어 실력과 집념으로 이룬 그의 학문적 업적에 거듭 경의를 표한다.

“깐수가 간첩에 머물지 않고 학자 정수일로 거듭 태어난 것은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의지 때문만은 아니다…거기에는 드러나지 않게 변호사, 검사, 판사, 법무부 장관에서 교도관에 이르는 공무원들의 배려 덕분이기도 하다.”(차병직)

정수일은 고 노무현 대통령 당시 강금실 법무부장관 때 석탄일 특사로 사면·복권됐다.

2003년 이슬람TV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정수일 교수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3년 이슬람TV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정수일 교수 <연합뉴스 자료사진>


정수일의 발자취

2008년 사단법인 한국문명교류연구소와 21세기민족주의포럼을 결성한 이후 종횡무진 발품을 팔아 세계일주를 다녔다. 제3대 세계 실크로드학회 회장(2017~2018)을 역임했다.

그의 사무친 회한의 변이다.
“지금까지 해온 일 일곱가지와 하지 못한 일 여섯가지를 결산해 보았다. 그 가운데 가장 가슴을 후비는 것은, 결국 나는 통일성업의 전선에서 한 몸을 바치겠다고 청춘을 보내고 이때까지 사느라고 살아왔는데 아직도 우리는 이 처참한 분단의 역사를 후대들에게 그대로 넘겨주게 되었다.”

출판기념회에서 “스스로 생각컨대 겨우 60점이나 맞을 인생”이라 낮추면서 “여생을 못다한 일을 하기 위해서 헌신하려고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새로운 민족론의 정립과 민족사 복원을 위한 시도’라는 그의 실천학문에 관심이 모아진다. <민족론과 통일담론>(통일뉴스 간)에서 민족주의 3대 속성으로 ‘연대의식과 민족수호의지, 발전지향성’을 그는 강조했다.

앞으로 이 세가지를 통일담론의 철학적 기조로 삼아야 한다면서 진일보한 통일론인 ‘진화통일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통일에 대한 ‘확신범’으로서 초지일관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성업의 험난한 현장을 숱하게 누비면서 비교적 적중한 정세분석과 평가 및 제의로 한때나마 남북간에 협의와 화해를 도모하는데 소정의 기여를 했다고 자평한다”고 했다.

“단언컨대, 평생 ‘용도폐기’를 당하는 그러한 무지렁이 약골로 살려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살 수도 없었고, 또 결코 그렇게 산 적도 없다”고도 했다. 분단의 비극과 불행을 후대에 남겨, 기성세대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한 것을 무엇보다 아쉬워했다.

그와 함께 민족적 통일담론에 과한 학문적 정립의 미숙성과 보급에서 소극적인 점도 안타까워했다. ‘새로운 인문학 분야인 문명교류학의 학문적 정립의 정초자’, ‘비교적 뚜렷한 족적으로 남겨놓은 것은 실크로드학의 학문적 정립’, ‘지식의 사회적 환원’(실크로드 정기답사 총 22회, 격년으로 연간 8~10회 시리즈 교양강좌, 20년간 총 388회의 초청강연), ’28년간 5대양 6대주의 종횡 세계일주 단행’을 보람으로 꼽았다.

그가 사회주의를 버렸는지, 알 길은 없다만 그것은 양심의 자유에 맡겨야 할 몫이다. 그의  활동이 대한민국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위험성은 없어보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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