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1일 아시아엔 창간 11돌에 초대합니다 -발행인 이상기 올림

안녕하세요, 아시아엔 발행인 이상기 입니다. 아시아엔은 오는 11월 11일 오후 2시 서울 명동 CGV에서 아시아엔 창간 11주년 기념식 및 AJA Award 2022 시상식을 개최합니다.

창간 11주년 소식을 전하면서 첫 기사부터 초창기 것들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설픈 것도 많고, 그런 기사도 있었나 무릎을 치는 것도 있더군요.

지난 번 첫번째 초대장에 이어 오늘은 2011년 11월 <아시아엔> 창간 당시 독자들께 밝힌 비전과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의 ‘축하 서한’과 2003년 노벨평화상 시린 에바디 이란 변호사의 ‘특별기고’를 공유합니다.

창간 11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초심과 꿈을 놓치지 않으려는 다짐에서입니다.

아시아 각국의 아자 회원들이 연대해 창간한 아시아엔은 창간 때 아기 금강송을 키우는 마음으로 기사 한꼭지 한꼭지에 정성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신개념 언론 출범···아시아의 꿈·도전으로 다가갈 것”

여기 갓 소나무의 모습을 갖춰가는 금강송이 있습니다. 아시아기자협회(Asia Journalist Association, AJA) 운영위원인 김인석 서울신문 기자가 지난 4월 문화일보의 ‘소나무 심기 캠페인’에서 씨앗을 분양받아 아기 손가락 크기로 키워 아시아엔(The AsiaN)에 기증한 것입니다.

아시아기자협회가 낳은 The AsiaN과 아기 금강송은 한 살 동갑내기로 독자 여러분께 출생을 신고합니다. 우람하게 뻗어 있는 금강송은 11월8일 경상북도 봉화군 문수산에서 The AsiaN이 촬영했습니다.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분포하는 금강송은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나이테가 조밀해 잘 썩거나 휘어지지 않으며 굵기만으로는 그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소나무입니다. 금강송 군락지에는 이처럼 수령 수백년의 우뚝한 금강송도 있고 이보다 훨씬 젊은 금강송과 일반 소나무, 잡목도 뒤섞여 있습니다.

금강송이 물과 흙과 바람과 햇볕과 더불어 자라듯 The AsiaN도 독자들의 다양한 음성과 시선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긴 여정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바른 길 가고 있는지 늘 살피겠습니다.

아기 금강송이 수백년 후 이처럼 늠름한 금강송으로 곧게 뻗어갈 수 있도록 꿈과 열정을 늘 간직하겠습니다. 아시아 권역의 고급정보와 정확한 분석 및 통찰력으로 독자 여러분께 다가가겠습니다. 아시아의 꿈, 아시아의 도전 The AsiaN은 눈을 뜨고 귀를 열어 마음을 다해 소통해 나가겠습니다.

The AsiaN이 초심을 잃지 않고 진중하게 커가도록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아시아엔 창간 축하 서한

2011년 11월 11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AsiaN 창간 축하 서한 전문.

아시아기자협회의 AsiaN 창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이 지역 최초의 온라인 매체로서 AsiaN은 출범합니다. 이는 아시아가 세계경제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오늘날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역 국가들의 지속적인 번영과 투자는 전 세계 수백만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나는데 기여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하고 역동적인 아시아의 모습은 전 세계가 새천년 개발목표를 이루어 나가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실업과 불평등으로부터 기후변화의 점증하는 위협에 이르기까지 더욱 복잡한 현실적 문제들과 부딪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 평화와 번영 그리고 자유와 정의를 지속적으로 확고하게 다져가는 것은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공동의제이자 목표입니다.

AsiaN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다루어 나갈 것으로 기대합니다. 언론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부가 국민을 억압하고 감시에서 벗어나려 할 때, 공정하고 자유로운 언론은 이러한 잘못들을 폭로하여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유지하는 강력한 수단이며 사람들이 차별과 소외를 당할 때 그들이 처한 곤경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긴급한 문제들이 산적한 이 때, AsiaN은 자유로운 아이디어와 정보의 교류를 통하여 이 지역 국가 및 사람들 간에 공통의 목표와 네트워크를 형성하도록 기여할 것입니다.

저는 아시아는 물론 UN과 UN의 전 세계적인 사명에 대하여 정확하고 신속한 소식을 보도하고자 하는 AsiaN의 목표를 지지합니다. 또한 AsiaN이 최고의 저널리즘과 다양한 견해를 통하여 인류에 귀중한 공헌을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한번 AsiaN의 발전과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UN 사무총장 반기문

시린 에바디 변호사가 2009년 8월 아시아기자협회 초청 강연회서 발표하고 있다. 왼쪽은 그의 <히잡을 벗고, 나는 평화를 선택했다> 한국판

[특별기고] 노벨평화상 시린에바디 “빈곤과 차별은 21세기 최대 적”

[아시아엔=시린 에바디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 이란 변호사]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평화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많은 지식인들과 민간 단체들이 평화 정착을 위해 활동하고 있고, 그들의 노고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평화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전쟁이 없는 것만으로 평화스럽다고 말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즉 어떤 국가가 직접적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다면 그 나라 국민들이 평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아니오’입니다. 전쟁이 아니라면 평화라는 이러한 정의는 수세기 전까지만 유효했습니다. 21세기의 평화는 다른 방식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전 세계,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에 퍼져 있는 에이즈는 그 어떤 총이나 무기보다 더욱 위험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2009년 유니세프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14세 미만 에이즈 환자는 300만명 이상입니다. 이 아이들은 나라가 전쟁 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생명을 곧 잃게 됩니다. 또 차드 공화국, 기니비사우,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와 같은 빈곤한 50여 개국에서는 6명 중 1명이 5세 이전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 사망의 주요한 원인은 위생시설과 마실 물이 없기 때문이고, 영양이 부족하며 백신주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이 폭탄 때문에 목숨을 내놓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극심한 가난 때문에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평화의 의미는 평온함입니다. 인간은 평온 속에서 자신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빈곤 때문에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는 이유로 구속되고 처벌받는 사람들, 살 집이 없어 노숙하는 사람들에게는 평온함이 없으며 평화롭게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평화가 사회에 확고하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두 가지 토대가 확실히 마련돼야 합니다. 바로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입니다. 종교적인 독재이든 정치적 독재이든 어떤 사회가 독재정치 체제 하에 있다면, 어떤 나라가 국민들의 의견과 투표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정부에 반대하는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구속하거나 총을 겨누는 방법으로 반대 의견을 잠재우는 사회가 있다면, 분명 그 나라의 평화는 언젠가 깨져버릴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의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란 다수에 의한 통치입니다. 그러나 자유 선거를 통해 다수가 권력을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다수가 원하는 방식으로 통치할 권리는 없습니다. 세계의 많은 독재자들이 민주주의, 즉 국민 대다수의 투표로 정권을 잡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히틀러가 바로 그 예입니다.

그러므로 선거에서의 승리가 민주주의를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자유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은 다수는 민주주의의 틀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러면 민주주의의 틀이란 무엇입니까? 민주주의의 틀은 인권에 대한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 권력을 잡은 다수는 오직 인권을 준수하는 틀 안에서 통치해야 하며, 이를 위반할 권리는 없습니다. 어떠한 권력을 잡은 다수라도 종교를 핑계로 우리 사회의 절반인 여성을 억압할 권리는 없습니다. 현재 이란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여성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권력자도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는 자유를 억압할 권리는 없습니다. 쿠바와 중국에서 일어난 일들이 그런 예입니다. 어떠한 권력자도 시민의 자유를 제한할 권리는 없습니다. 사람들의 전화 통화를 도청하고, 이메일, 소포 등을 검열하는 북한이 그러한 예입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정의를 바탕으로 통치자들은 단지 국민들의 투표뿐만 아니라 인권 존중을 통해서 정당성을 찾아야 합니다. 인권을 무시하는 어떠한 핑계도-문화적 상대성, 종교, 이데올로기-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평화에 있어서 두 번째 토대가 되는 것은 사회정의입니다. 계급 차별이 극심한 사회에서는 평온이 정착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 이웃들이 굶지 않을 때 행복한 시기가 올 것입니다. 세계 부의 75% 이상이 1% 사람들의 손에 달려있는 지금 국제 사회에서 평화가 정착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2008년 국제노동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1억 3천명의 아이들이 위험이 따르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사회정의는 국제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도 관심을 두고 다뤄야 할 문제입니다. 부자와 빈자의 차가 큰 사회는 평온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경험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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