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음유시인·가수 이동원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동원(가운데), 오른쪽이 필자 오길석

나의 친구 가객 이동원이 오랜 병고를 이겨내지 못하고, 지난해 11월14일 70세에 불귀객이 되었다. 이동원은 연예계에서 드물게 자아의식이 뚜렷해, 우리 몇몇은 그를 가수라고 부르는 대신 음유시인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평양이 고향인 양친의 슬하에서, 1951년 한국전쟁 중 피난지 부산의 범냇골에서 태어난 이동원은 자라면서 성악에 뛰어난 자질을 발견했다. 보성고 재학 중 보컬을 꾸며 활동하다, 졸업 후에는 본격적으로 세시봉과 학전 등에서 뛰어난 가창력을 발휘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그는 김민기, 윤형주, 조영남 등과 활동했다. 대중성은 다소 떨어져도, 이동원은 독특한 음색과 의식 있는 가사로 자신의 영역을 개척했다. 하지만 상업적인 바탕에서 존재해야 하는 연예계에서 언제나 변방에 머물 수밖에 없어 안타깝기만 했다. 대신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사회참여로 진가를 보여줬다.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5.18광주항쟁, 보도연맹사건 등 굴곡된 역사에 대해 그는 노래를 통해 시민의식을 깨우는데 동참했다.

이동원(왼쪽 두번째)과 필자 오길석(왼쪽) 등 지인들이 마산 어시장으로 이동원을 초대했다

지방출장의 경우 수백만원의 개런티를 받는 그였지만 필자가 주관한 몇몇 행사에 교통비와 의상비만 받고 출연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나를 비롯한 주최측은 그를 마산 어시장으로 초대해 싱싱한 회에 소주 한잔 대접하며 미안한 맘을 전하면 그는 “이런 게 친구간 우정 아이가?” 하며 미소짓곤 했다.

소탈한 인간성의 소유자였지만, 자신의 노래에 대한 자존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의 노래는 대부분 러시아국립 상페테르부르그 교향악단의 반주로 취입했다. 녹음도 모스크바국립방송국 스튜디오에서 해왔다. 국내에 자신의 음역을 받쳐줄 반주가 없고, 소화할 수 있는 녹음실이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수 이동원(오른쪽)과 박인수

서울대 박인수 교수와 듀엣으로 부른 정지용의 시 ‘향수’는 국민 애창곡의 앞줄에 자리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 노래는 200만장 넘게 팔렸다고 한다. 이동원은 명실상부한 ‘음유시인’이었다. 이동원이 함께 부른 박인수 교수에게 “성대 관리도 안하고, 음정이 엉망”이라고 티격티격하며 투덜대는 걸 본 적이 있다. 말 그대로 못 말리는 자부심의 소유자였다.

매사 그런 스타일이니 매니저, 프로듀서, 기획자들과는 불화했지만, 이런 것에 개의치 않고 자기류의 음악세계를 구축한 독보적인 가수가 바로 이동원이다. 그는 병을 얻은 후 병이 깊기도 했지만, 병원이나 의사에 의존하기보다 자연요법에 심취해 별다른 연고도 없는 전라도 담양의 지인 집에서 만년을 보냈다. 임종을 지키는 이 없이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친구가 황망하게 가버린 상실감이 시도때도 없이 내게 밀려온다. 벌써 거반 다섯달이  흘렀다. 친구 이동원의 극락왕생을 빌며

임인년 중춘 오길석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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