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 당시 3부요인 이승만 신익희 김병로의 ‘공통점’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열흘 뒷면 광복 76돌, 대한민국정부수립 73주년을 맞는다.
대한민국이 건국하면서 3부요인은 이승만 대통령, 국회의장 신익희, 대법원장 김병로였다. 이승만, 신익희, 김병로 세분은 나이나 독립운동 관록이 비슷했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늘 같이 앉았다. 이승만은 3부요인이 당연히 같이 앉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대통령이 국회의장, 대법원장 위에 앉은 것은 박정희 대통령시절부터다. 여기에 대해 누구도 문제 제기를 안 했고 그러려니 하면서 굳어졌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선임되었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초대 국회에서 신익희는 민의원 의장이 되었다.
이승만 독재가 강화되어 민주당에서 신익희는 이승만에 대항하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1956년 그의 한강 백사장 연설에 30만 군중이 운집하자 자유당은 일대 공황에 빠졌다. 그러나 선거 유세차 익산으로 이동하는 도중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공백으로 남겨진 투표용지에 그에게 많은 국민이 표를 던졌다. 민심이고 천심이었다.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한 조병옥은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수도청장 장택상과 함께 경찰 총수였다. 1948년 파리 국제연합 총회에 참석하여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그후 이승만 정부에서 멀어졌으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내무장관으로 대구를 방어했다. 그는 1955년 민주당이 결성되자 참여해, 신익희가 급서하자 대표 최고위원으로 추대됐다. 이후 민주당이 신파, 구파로 분열하자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였다. 1959년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나 신병 치료차 미국에 갔다가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신익희와 조병옥은 이승만에 맞설 만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이후 카리스마 있는 정치가를 한국정치에서 찾기 어려워졌다. 5.16이 나자 장면 총리는 갈멜수녀원으로 숨어들었다. 신익희나 조병옥이 이때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쿠데타를 만나지도 않았겠지만, 위기 시에 몸을 혼자 피하는 한심한 작태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은 유일한 헌법기관인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군”이라고 하면서 남의 일 보듯이 할 뿐이었다.
장면 총리의 무책임으로 말미암아 민간인의 정치는 사라졌다. 송진우, 여운형, 신익희, 조병옥 등은 모두 일세를 풍미하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