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산책] ‘기자 이형균’ 팔순에 낸 첫 책 ‘세상이 변한 것도 모르시네!’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원로언론인 ‘이형균’은 언론계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헹퀸’ ‘나폴레온’ ‘작은 거인’ ‘진짜 마당발’ ‘왕형님’ 등등···. 대부분 외모와 관계에 따른 것이며 대체로 그를 잘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한국기자협회 회장 시절이던 2002년 3월이니 만 16년반이 지났다. 중국기자협회와의 정기교류를 위해 단장인 필자를 포함해 모두 10명으로 구성된 ‘한국기자협회 중국방문단’ 고문으로 그가 동행했다. 7박8일 동안 언론인 이형균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스무끼의 식사와 오전, 오후 그리고 저녁까지 하루 3~4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당시 일행은 말 그대로 하나가 될 수 있었는데, 그 첫번째 요인은 그의 동행이었다.
당시 발견한 언론인 이형균의 모습 몇 개를 소개하면 이렇다. “유머가 뛰어나고 이야기의 앞뒤가 들어맞는다.” “약속시간을 아주 정확히 지킨다.” “털털하면서도 아주 치밀하고 심지어 까다롭기까지 하다.”
그는 방문지 이동을 위해 대기하던 버스에 늦는 일행에게 “이거 디스야, 디스”하고 말한다. 그에게 여쭸다, 디스가 무슨 뜻이냐고. 그는 “맘에 안든다는 말이지. 맘에 든다는 플레저(pleasure)에 부정(否定)을 뜻하는 접두사 ‘디스’(dis)를 붙여서 디스플레저 즉 ‘맘에 안든다’는 뜻으로 쓴다”고 했다. 언론인 이형균은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기자들이 기사 마감시간은 잘 지키는데, 약속시간은 별로 안 지켜. 그것 참 문제야.”
당시 동행했던 전국의 신문·방송·통신기자 9명(그를 제외하고)은 지금도 이형균 선배(그는 진짜 선배다운 선배다!)를 ‘디스 선배’라고 부른다. 가장 좋아하고 닮고 싶은 선배를 ‘디스 선배’라고 부르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어디 있나?
언론인 이형균이 지난 9월 11일 팔순을 맞아 책을 냈다. 그의 말처럼 ‘지난 무덥디 무더웠던 여름 한달 만에 뚝딱’ 냈다. 그는 경향신문 수습기자로 시작해 정치부장, 워싱턴특파원(문화방송 특파원겸임), 편집국장, 논설위원, 출판이사(대우)로 이 신문사에서만 30년 넘게 기자로 보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집필한 글들을 모은 이 책은 제목이 재밌고 한방 먹인다. <세상이 변한 것도 모르시네!>(미디어피알, 2018년 9월5일 초판 1쇄 발행).
부제로 ‘이형균의 낮은 목소리’를 달고 나온 이 책 머리말은 ‘칼럼은 세상을 일깨우는 종소리다’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는 여기서 “이 책이 독자 여러분에게 단순한 칼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과거의 족적을 살펴보고 오늘의 편리함을 깨닫게 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세상이 변한 것도 모르시네!>은 제1장 ‘그래도 종이신문’으로 시작해 ‘여백이 있는 정치’ ‘선진국이 되는 길’ ‘세상이 변했네요’ ‘큰 소리 작은 소리’ 등 모두 5장으로 돼있다.
몇 대목을 소개한다.
“심층해설 등으로 여론을 주도하는 종이신문은 ‘신문에 났던데···’라는 말이 엄존하는 한 오래도록 인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그래도 종이신문이다. 2006.3.15)
“정부의 누구라도 평기자가 인터뷰하면 되는 것을 특별대담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장, 부국장, 국장 심지어 주필이 나서 인터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서울시장이라면 시청 출입기자가 인터뷰하면 된다. 사회부장이나 부국장까지 나설 필요가 없다. 기자 스스로 격을 낮추는 행동을 중단해야 한다.”(무관의 제왕, 1997.7.1)
“토크쇼의 제왕이라고 하는 래리 킹도 저서 <대화의 법칙>에서 ‘최고의 말하기 기법은 듣기다’라고 설파했다.”(소통과 불통사이 언론, 2013.11.24)
“언론계의 남재희 선배께서 1971년 ‘총선거에 기대하는 이란 제목으로 쓰신 글 중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권력의 성은 총선거라는 축제 때에 문을 연다. 그때 비로소 성밖에 웅성거리던 백성들은 성안으로 들어가 구경도 하고 이것저것 말참견도 하고 때로는 성주를 바꾸기도 하는 기회를 갖는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다시 성문은 굳게 닫히고 만다.”(선거보도, 축제인가 전쟁인가, 1985.9.1)
“정치인들도 국회의장의 권위를 떠받들어 중재자를 아끼고 키우는 풍토를 스스로 조성해야 한다.”(원로부재 정치문화, 1985.12.13)
“일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도서관에 있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청백전과 청년 일자리 만들기, 2008.7.15)
“누가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아, 갸가 그렇게 됐어?’ ‘걔는 내가 키운 애지’라든가 ‘그거 해가지고 밥이나 먹겠나?’고 조롱조로 얘기해서는 결코 건전한 사회가 이뤄질 수 없다.”(성공한 사람을 존경하는 사회, 1982.3.4)
“내가 침묵하고 있으면 생각이 깊은 것이고 남이 침묵하고 있으면 생각이 없는 것이다. 내가 화를 내면 이유가 있는 것이고 남이 화를 내면 그릇이 작기 때문이다. 내가 윗사람을 기쁘게 하면 협력하는 것이고 남이 윗사람을 기쁘게 하면 아부하는 것이다. 내 아들이 처가에 자주 가는 것은 줏대 없는 일이고, 사위가 자주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우스개소리지만 우리 지성인들이 이런 편견을 갖고 있다면 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내로 남불’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2016.8.4)
“‘Don’t give up!’라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Never give up!’라고 말했다. 이어서 Don’t you ever and ever give up!‘라고 말했다. 이 세 마디 말만 하고 처칠은 연단에서 내려왔다. 이 짧은 축사에 참석자들은 오랫동안 박수를 그치지 않았다.”(절대로 포기하지 마세요! 2010.3.15)
공감과 영감을 동시에 주는 이런 글은 그가 맡아온 역할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리보다 일을 중시하는 그는 한국기자협회 회장, 프레스센터 전무, KBS 시청자위원장, 한국외대·경희대·인하대 객원·겸임·초빙 교수, 서울대 관악언론인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최근에는 서울대총동창회 발행인과 (사)아시아기자협회 이사장을 맡았다.
언론인 이형균은 정치권 영입 제의를 몇차례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기자의 길이 내 길’이란 신념에서였다고 한다.
이 책이 한달 만에 뚝딱 만들어졌다고 한 그의 말은 겸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형균 선배의 80 평생의 땀과 눈물 그리고 치열한 열정이 함께 빚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