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통엔 무슨 잘?”···종근당 하면 생각나는 두 사람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두통엔 무슨 잘?” “펜잘!”로 잘 알려진 종근당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물론 내년이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고 이종근 회장이 안 계셨다면 맺어지지 않았을 인연이다.

2010년 9월 유명을 달리하신 김두식 전 종근당 사장이다. 1975년 동아일보 해직기자는 그는 한겨레신문 창간 때 사회부장으로 합류해 사장으로 마친 분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988년 3월 한겨레신문 수습기자로 입사했을 때다. 그는 사회부장과 광고국장 등을 거쳐 대표이사 회장 아래의 사장에 올라 초기 한겨레 발전에 디딤돌을 놓았다.

그는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후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그는 ‘곰바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어린 기자 눈에도 그는 융통성이라고는 없이 원칙을 강조했다. 말 그대로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한겨레신문 퇴직 후 종근당 사장으로 옮겼다. 그의 원칙적인 면을 높이 사서 이장한 회장이 초빙했을 거란 짐작만 한다.

나는 그가 충정로 종근당 사옥 인근으로 두번 불러 함께 점심을 했다. 그때가 1990년대 후반, 나는 그를 따르는 한겨레 후배들과 설 명절에 세배를 가곤 했다. 그때마다 그는 동아일보 시절, 그리고 한겨레신문 창간 때 이야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아마 그가 오래 전 태어났으면 김시습이나 김삿갓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2004년 노무현 정부에서 처음 만든 신문윤리위원회 산하 독자옴부스맨으로 3년간 근무한 후 2010년 9월 별세하셨다.

또 한 사람은 간접적인 인연이다. 언론인 고 최석채 선생의 아들인 최장원 종근당홀딩스 이사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30년 가까이 기자로 봉직하다 2016년 종근당 홍보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와는 1988년 여름 서울 서부지역의 경찰서와 대학 등을 커버하는 사회부 경찰기자로 처음 만난 후 2년 뒤 이번엔 서울 남부지역을 담당하는 사건기자로 다시 만났다. 그 무렵 그의 부친이 언론인 최석채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1980년대 초 나의 군생활 동안 내게 가장 가까이서 친구가 돼준 것은 신문이었으며 그 중에서 대구매일신문이었다. 나는 매일신문의 최석채 칼럼을 읽으며 군밖의 바깥세상과 설익은 내면을 조금씩 채워갈 수 있었다. 사실 정확히 어떤 글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도 이런 칼럼니스트가, 이런 칼럼이 있구나’ 정도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마주했던 최석채의 아들이 바로 최장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종근당과 나의 인연이 결코 적다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전 종근당 사이트를 조회해봤다. 두 대목에서 나의 눈길이 멈췄다.

“1948년 해방후 혼란기에 사기를 당해 가짜약품을 유통하다가 서대문경찰서에 피소되었다. 이후 고의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어 풀려나기는 했으나 이 사건은 이종근(창립자)이 직접 약을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종근은 종근당약방 2층에 대광화학연구소라는 종근당의 첫 연구소를 설립하고 1949년 10월 바셀린에 항생제 다이아진 분말을 혼합해 튜브에 넣어 제1호 제품인 ‘다이아졸 연고’를 만들었으며, 이것이 국내최초의 튜브제품이다.”

“1950년대 부산피난 시절부터 종업원에게 야간학교를 다니게 지원하는 등 일찍부터 장학사업을 통한 사회 환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60년대 사원대상 지원 사업을 확대하여 1972년 말에 종근당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전 종업원의 자녀에게 중학교 이상의 학자금을 지원하는 장학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종근은 ‘기업에서 얻은 이윤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고 마땅한 일이다. 나는 내가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육영사업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1979년 이종근은 경영일선에서 은퇴하여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장학 사업에 본격적으로 매진하였다.”

창업 77년 종근당이 ‘보국건민’(保國健民)의 횃불을 높이 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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