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혜미의 한류칼럼] 신 한류스타 박보검 그리고 케이-팝, 케이-클래식
[아시아엔=채혜미 재싱가포르 언론인] 싸이의 ‘강남스타일’ 유튜브가 한창 인기를 끌 무렵, 오랜만에 방문한 오클랜드의 브라운스 베이를 산책하다가 근처 CD가게에서 말춤을 추고 있는 싸이의 포스터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게 안으로 옮겨졌고 키위 주인 아저씨와 그 포스터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싸이의 열렬 팬이라는 그는 싸이의 포스터를 어렵사리 구했다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나는 이런 조용한 마을에 싸이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했었다. 왜냐하면 ‘사우스코리아에서 왔느냐? 노스코리아에서 왔느냐?’를 먼저 물어보는 뉴질랜더들 속에서 살다가 싱가포르로 이주하면서 한국드라마 속에 나오는 탤런트 이름을 줄줄이 외우고 있는 현지인들을 접하게 되면서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싱가포르에서 느끼는 ‘한류’ 열풍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서 그 시절 원더걸스의 ‘노바디’라는 노래가 유행할 때는 싱가포르 전역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특히 현지인들 모임에서도 그 노래 후렴부의 특별한 리듬에 맞추어 박수 치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한국 탤런트 사진을 핸드폰에 저장해 놓고 수시로 들여다보는 열렬 팬 혹은 한국 탤런트의 사진을 아예 지갑에 넣고 다니는 현지인을 보면서 ‘한류’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은 뉴질랜드에서도 한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겠지만 사실 필자가 뉴질랜드에 거주할 당시(1996-2007)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과 반응을 보이는 뉴질랜더를 별로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만 가족이 한국에 영어교사로 갔다거나 혹은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가족 정도가 한국에 대해 호감을 보인 정도였다. ‘현대’나 ‘삼성’도 일본기업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국에 대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 지 난감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아시아권인 싱가포르는 정말 많이 달랐다. 많은 현지인들이 한국여행을 다녀왔고 한국음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배우, 탤런트, 가수 등의 사생활까지도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사람과 사귀고 싶다며 여동생이나 남동생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현지 젊은이들은 물론 한국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현지 아주머니, 웨딩 화보 찍으러 한국간다며 좋은 한국 관광지와 맛집을 소개해 달라는 예비 신혼부부, 1박2일 프로그램에 소개된 곳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청년들, 아시아 최고의 선수 박지성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축구 팬 등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한국인으로 어디서나 모범적인 선진국민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한류’는 드라마나 K-Pop에서 시작되었지만 산업 전체에 미치는 다양한 파급효과는 물론 특히 한국인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과 기대치가 매우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최근 한국을 다녀온 싱가포르에 사는 지인에 의하면, 싱가포르 창이공항 입국장에서 환호하는 싱가포르 소녀들의 틈을 비집고 빠져나오느라고 힘들었다고 한다. 다름 아니라 한류스타 ‘박보검’이 팬미팅을 위해 싱가포르에 도착하는 날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했다. 동남아를 순회하는 ‘한류 스타’를 보기 위해 젊은 현지인들이 공항마중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다. ‘한류스타’의 이름이 쓰인 피켓을 들고 출국장을 꽉 메운 환영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는 상황은 뉴질랜드에서 살 때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다.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공항에 다수 경찰이 동원되는 풍경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의 인기 드라마로 주제곡(OST) 또한 인기가 높아지면 많은 현지인들이 한국사람들에게 가사 내용 번역을 부탁하기도 한다. 뜻도 모르면서 따라부르다가 한국어를 배우게 된 현지 젊은이도 적지 않다.
대중문화가 한국을 홍보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지만, 우리가 가진 다양한 문화와 수준 높은 클래식문화도 널리 알리는 균형 있는 문화홍보 전략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중문화는 유행이 민감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콘텐츠가 업그레이드 되지 않으면 어느 시점이 지나서는 더 이상 새로운 수요가 창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향곡선이 불가피한 것이다.
한국은 그동안 클래식과 전통예술 전문인력이 많이 양성돼 국제무대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싱가포르에는 예술대학이 소수이며 특히 오페라 가수 숫자가 매우 적어 항상 한국가수를 초빙하지 않으면 다양한 레퍼터리에 나오는 배역을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없다.
특히 유럽무대에서 활동하던 한국의 오페라가수들은 기량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 어느 무대에서든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시안의 얼굴을 가지고 역량을 발휘하는 한국인이 오페라 주인공으로 아시아 간판스타로 부담없이 초빙된다. 일본은 굴지의 기업이 클래식음악회와 음악인을 후원하고, 중국은 정부차원에서 클래식 음악을 육성한다. 그러나 한국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세계수준의 클래식 반열에 올라 국제무대의 콩쿠르대회를 휩쓸고 있다.
이태리에서 열리는 성악 콩쿠르 중에는 지원자들을 한국인과 비한국인으로 나누어서 참가시키는 콩쿠르가 꽤 있다. 왜냐하면 우승, 준우승 모두 한국인이 차지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의 참가 의욕을 저하시키는 것이 큰 이유라고 한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타고난 능력뿐 아니라 노력으로 유럽의 성악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한국의 오페라가수들이 싱가포르 오페라단 주인공으로 초청되면서 현지 팬들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성악가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고, 한국 성악가에게 개인 레슨을 받으려는 사람도 있다. 한국인 오페라 가수가 출연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 일본에서까지 비행기를 타고 오는 일본팬도 있다.
현지인들과 싱가포르에 상주하는 유럽인들 중에 오페라 마니아들은 한국 성악가들의 탁월함을 이미 알기 때문에 공연을 손꼽아 기다린다. 오페라 종주국인 유럽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한국 성악가수 공연을 즐기는 현지인들은 출중한 실력을 가진 한국인을 통해서 아시안으로서의 자부심과 더불어 대리만족감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오페라 무대에서 왜 환영받는 것일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특히 오페라나 독일가곡을 가장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는 한글의 발음체계 덕분이다. 이 점은 세종대왕께 감사해야 할 부분이다. 대부분의 오페라들이 이태리어로 되어 있는데 가장 가까운 발음을 한글로 표기 할 수 있기에 가사를 익히고 정확한 발음으로 노래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한다. 또한 선천적으로 열대지방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아름답고 명쾌한 소리를 내는 한국인의 탁월한 성대와 풍부한 성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 창작 오페라 <천생연분> 공연이 3년 전 싱가포르에서 있었다. 아름다운 한복의상에 한국적 분위기의 무대장치와 해학이 넘치는 스토리 전개는 뛰어난 연기력과 음악성을 보여주었다.
자녀들이 혹시 K-Pop에 너무 빠져 있다면 아름다운 한국의 시가 들어있는 한국가곡을 소개하면서 균형있는 예술문화의 감각을 키워주면 어떨까? 해외에서 자녀를 키우면서 한국의 전례동화도 들려주고 판소리도 함께 차세대에 전수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세계무대를 빛낼 진정한 예술가들을 탄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