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새벽’ 그 짧고 긴박한 조우
미국 AP통신 사이공지국장 조지 에스퍼의 타계에 접하여?
사이공 최악의 날
사이공 1975년 4월28일.
이 날을 나는 ‘사이공 최악의 날’이라고 저서 <사이공 최후의 새벽>에 기록했다.
오후에 맑았던 하늘이 캄캄해지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쏴 소리와 함께 우기를 알리는 첫 스콜이 패연(沛然)히 쏟아졌다. 아침에 사이공 하늘을 뒤덮은 불길한 검은 연기와 한낮 긴급 철수의 불안한 소동을 모두 씻어내려는 듯 장쾌하게 퍼부었다. 빗줄기를 묵묵히 바라보면서 나는 마음이 차분히 내려앉았다.
오후 5시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장군은 독립궁 회의실의 샹들리에 밑에서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있었다. 불과 1주일 사이에 응웬 반 티우(NGUYEN VAN THIEU)가 사임하고 뒤를 이은 쩐 반 후옹(TRAN VAN HUONG)이 사임한 자리였다.
오후 8시의 통행금지 시간이 오기 전에 저녁을 먹어두어야 했다. 지프차를 한국 식당 ‘지미(知味)의 집’ 앞에 세우려다 생각을 바꾸어 에덴 빌딩으로 갔다. AP통신 사무실에 들려 지국장 조지 에스퍼를 다시 만날 요량이었다.
월남 전투기 탄손누트 공격
에덴 빌딩 4층의 AP통신 지국은 기자들이 떠나버려서 한산하기는 했으나 텔레타이프는 활기 있게 소음을 내고 있다. 조지 에스퍼는 타이프라이터 앞자리를 지키며 한가롭게 앉아 있었고 방문객 한명이 텔렉스 기사철을 뒤적이고 있다. 안경잡이 사무엘슨은 내가 1971년부터 2년 가까이 주재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시기에는 사진부 책임자였는데, 지금은 리포터(기자직)가 되어 기사문을 타자하고 있었다. 조지 에스퍼는 레바논계 이민가정 출신으로 푸른 눈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사람이다. 10년 가까이 사이공지국에 근무하며 월남 여인과 결혼해 살았는데 이번에 만나 보니 지국장이 되어 있었다.
나는 전날인 27일 낮에도 조지 에스퍼를 찾아가 사이공이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미국대사관 신문과의 미스터 호건을 찾아가 보게. 늦었으니 빨리 서둘러라.” 그는 전화번호를 종이에 써 주었다. 오후 6시, AP통신에 들어간 직후였다. 돌연 ‘꽝! 꽝!’하고 지근탄의 폭발음이 천둥처럼 울렸다.
“공산군이 사이공 시내에 로켓 공격을 시작했구나!” 그런데 로켓탄 치고는 위력이 지나치다. 잇달아 폭음이 울리고 육중한 에덴 빌딩의 유리창이 부르르 떨었다.
전 시가에서 대공 포화가 ‘탕 탕 탕 탕’, ‘따 따 따 따’하고 지축을 흔들며 울려 퍼졌다.
“시가전이구나, 드디어 공산군이 입성했구나!”
모두들 얼굴이 창백해졌다. 조지 에스퍼가 몸을 숙인 자세로 급히 전화를 걸었다.
“뭐, 탄손누트 폭격이라고? 왜 그래, 누가 그래? 뭣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는 전화에 대고 고함을 쳤다.
탄손누트 공격이라면 공산군의 미그 전폭기가 날아왔다는 말인가.
엎드려 있던 AP통신 사진기자 한 명이 책상으로 달려가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사진, 사진을 찍어야지.”
렉스 극장이 마주 보이는 창문 쪽으로 그가 벌벌 기어갔다. 나도 카메라를 메고 그 뒤를 따라서 기었다. 창문으로 잠깐 고개를 내밀고 카메라를 들이대고 하는 사이에 총격은 미친 듯이 계속되었다. 석양의 구름 사이로 미군 수송기 한 대가 지그재그로 도망치고 있다. 괌으로 피난민을 수송하는 C-130 수송기인 것을 금방 식별할 수 있다. 독립궁과 시가의 고층건물에서 난사하는 대공포화의 붉은 궤적들은 일제히 그 비행기로 집중하고 있었다.
“미국에 대한 반란이다.”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지나갔다.
렉스 극장에서 뛰어나온 월남 남녀들이 쌍쌍이 달음박질친다. 행인이 일시에 흩어져 거리가 텅 비었다. 혼다 오토바이 한 대가 레 로이 대로를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남자는 오토바이 경주할 때의 모습처럼 납작하게 엎드린 자세로 죽자꾸나하고 도망쳐 간다.
“다들 엎드려, 여자들은 엎드려.”
질린 얼굴로 소리치던 조지 에스퍼는 갑자기 타이프라이터 앞으로 달려가 ‘지급(至急, URGENT)’으로 기사를 두들겼다.
지급. 몇 대의 공군 제트기가 28일 오후 6시, 탄손누트 공항을 폭격 중이다. 무슨 비행기가 왜 탄손누트를 공격하는지 아직 확인할 수 없다.
나는 AP통신 사무실 문을 박차듯이 열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6시15분, 폭격과 기총소리가 뚝 멈췄다. 길 위에 나와 있는 것은 외신기자들뿐이었다. 철모를 뒤집어썼거나 방탄조끼를 입은 카메라맨들만 람손 광장 주변을 뛰어다녔다. 월남군인 두 명이 군모를 벗어 쥔 채, 해병 동상 밑을 뛰어 달아났다. 그 뒤로 카메라맨이 셔터를 누르며 추격해 갔다.
미국 ABC 텔레비전의 취재팀은 무개차를 몰고 시청 앞 분수대 옆을 질주하며 카메라를 전속력으로 돌렸다.
오후 7시, 숙소에 뛰어든 나는 아메리칸 라디오를 틀었다.
긴급 공지 사항을 알린다. 긴급 공지 사항을 알린다. 지금 이 순간부터 24시간 통행금지령을 월남 정부 당국이 선포했다. 즉시 숙소로 돌아갈 것. 즉시 귀가하여 다음 공고가 있을 때까지 대기할 것. 다시 한 번 공지 사항을 전한다…….
1975년 4월28일 저녁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눈 앞에 두고 이렇게 나는 조지 에스퍼와 조우했다.
‘바므이 땅뜨’30주년과 조지 에스퍼
베트남은 사이공을 떨어뜨린 ‘바므이 땅뜨(4월30일)’를 ‘남부해방기념일’ 및 ‘통일 기념일’ 로 기념한다. 2005년 4월30일은 30주년을 맞은 해여서 베트남은 어느 해보다 성대한 기념행사를 폈다.
나는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현장 취재한 인연이 있기에 그날에 맞추어 호찌민 시(옛 사이공)로 감상여행을 떠날 요량이었으나, 졸저 <사이공 최후의 표정 컬러로 찍어라>를 출판하는 일로 발이 묶여 5월 초에야 그곳에 갔다.
그해엔 각국 기자 400여명이 남부해방 30주년을 취재하러 호찌민시에 모여 들었다. 그 중에는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대학 저널리즘 방문교수가 된 조지 에스퍼도? 있었다. 그는 ‘본 특파원, 사이공의 함락을 다시 가보다’라는 제목으로 30년 전 최후의 날을 회상하는 감상여행기(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4월30일자)를 썼다.
자주정신·애국심이 승리의 원천
미국 AP통신 사이공지국 사무실은 중앙광장 곁에 있는 에덴빌딩 4층에 있었다. 조지 에스퍼는 자기가 옛날에 거주하던 같은 건물 3층의 아파트를 방문하여 그곳에 사는 베트남 주민을 만나는 장면으로 기사를 풀어갔다. 그는 사이공 지국장 시절에 큰 사건이 터지면 때를 가리지 않고 한 층 위에 있는 지국으로 뛰어올라가서 취재하고 송고한 일을 회상했다. 그는 30년 전에 자기가 사이공 정권의 말로를 전한 기사를 인용했다. 그 기사 제목은 ‘항복’이라는 영어단어 한 자였다.
“[사이공발 AP통신] 남베트남 대통령 두옹 반 민은 수요일에 북베트남군에게 무조건 항복한다고 발표했다.”
에스퍼는 북군이 사이공을 해방한 직후에 AP지국 사무실에 들어섰던 북베트남 전사와 30년 만에 재회한 장면으로 기사를 끝맺었다. 당시 55세가 된 왕년의 해방군 전사가 한 말은 “양쪽 정부만이 전쟁을 원했소. 베트남과 미국의 대다수 국민은 전쟁을 원치 않았소.”였다는 것이다.
당시 나는 베트남이 항미전쟁에서 승리한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짚어보았다. 압도적인 무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적인 요소’ 즉 정신력이라고 할 수 있다.
쯔엉 쏜 산맥을 따라서 장장 1만6000km를 잇는 정교한 보급망 호찌민 통로나, 게릴라전의 요새로 사이공 외곽까지 250km를 뚫어놓은 꾸찌터널은 항미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적 요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사람들의 독립심과 인내심과 유연성, 그리고 사회주의에 접목한 애국주의가 정치적·정신적·군사적 승리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베트남 취재 상징
미국 AP통신 사이공지국장이었던 조지 에스퍼는 미국에서 베트남전쟁 취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노이의 북군이 1975년 4월30일 사이공을? 해방했을 때 그는 피터 아네트 등과 잔류하여 사이공이 어떻게 함락됐고 미국을 패주시킨 베트남 병사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렸다.
그는 지난 2월2일 밤 수면 중에 79세로 사망했다. 위싱턴포스트를 비롯한 미국 언론은 베트남의 전쟁과 평화를 보도한 특파원이라고 전했다. 1965년 사이공지국 기자로 부임하여 10년간 일했고, 1993년 미국이 베트남과 다시 수교하자 하노이의 AP통신 첫 지국장으로 부임하여 1년 간 근무했다. 2000년에 기자 생활을 접고 웨스트버지니아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기독교 레바논의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베트남 외교부는 2월6일 AP통신 하노이지국에 특별히 애도의 뜻을 담은 조의문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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