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전설은 영원히…관용·경청의 성군 무굴제국 악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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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아시라프 달리 아시아엔 중동지부장] 인도의 델리와 아그라를 여행하는 동안 필자는 니자무딘 아흐마드 바크시가 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무굴시대 위대한 정복자였던 압둘-파타 제라루딘 무하마드 악바르 황제의 업적을 다뤘다. 사랑과 증오, 사실과 허구, 델리와 아그라···. 악바르 황제가 1605년에 사망한지 4세기가 지나서야 나는 이 남자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2008년, 악바르 황제 시대의 수도였던 아그라의 술탄 악바르 궁전이 아닌 러시아 연방 공화국 타타르스탄 수도 카잔의 거대한 피라미드 계단에 레드카펫이 펼쳐졌다. 매년 카잔에서 열리는 ‘카잔국제무슬림세계영화축제’(Kazan International Muslim World’s Cinema Festival) 에서 인도 배우 리틱 로샨이 출연한 영화 <조다 악바르>가 상영된 것이다. 악바르가 숨진 후 400년 역사의 술탄 악바르 궁전의 모습이 내 눈앞에 다시 되살아났다.

이 영화는 두 명의 술탄을 다룬 책 <아크바나메>(Akbarnameh)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조다 악바르>는 뛰어난 무예와 때론 자비롭고 때론 잔혹한 통치, 그리고 종교적 관용 등 악바르의 모습을 다각도에서 그려냈다.

악바르는 그의 지지자들에겐 자비로웠지만, 반역자에겐 극악무도했다. 그는 반역자 아타가 칸을 지붕에서 두 번이나 떨어뜨려 사형시켰다. 한번 떨어뜨린 것으로 죽지 않자 다시 떨어뜨린 것이다. 이는 영화 <조다 악바르>에서도 생생하게 재연됐다. 반면 악바르는 종교에 대해선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16세기 인도에선 포르투갈 선교사들에 의해 천주교가 처음 등장했다. 악바르는 선교사들로부터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등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천주교로 개종을 하지 않았지만 선교사들을 위해 성당을 짓도록 하고 사람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종교에선 자비를 베풀던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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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신자였던 악바르는 꾸란과 수나(Sunna)의 종교관을 따랐다. 꾸란과 수나를 통해 관용(tolerance) 정신을 배운 그는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다. 제국이 강성하기 위해선 민족공동체와 종교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 일행은 1571년에 지어진 사원(모스크)에서 기도를 드렸다. 당시 이맘(성직자)들은 이곳에서 신도들을 안내했다. 이 사원은 악바르가 세운 첫 모스크로, 학교와 기도원 등 다양한 시설들이 모여 있다. 기도원은 셀주크 왕조의 영향권에 있던 이스파한 모스크와 유사하다. 반면 갤러리 뒤편의 방들은 오스만제국, 장식은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 타 문화와 종교에 관용을 베푼 통치자 악바르의 뜻을 따라 다양한 문화가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무굴 제국시대엔 술탄이 군사, 사회, 종교 모든 분야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악바르는 그의 측근들과 소통하며 부하들의 불만을 경청해 주는 군주였다. 각 부처엔 장관급 정치인들이 있었고, 경제, 국무, 법무부터 이슬람 율법에 반하는 인사들을 감시하는 관할부서들이 존재했다.

이후 필자 일행은 악바르가 고관들과 의견을 나눴던 법정으로 향했다. 악바르의 권력을 보여주는 왕좌가 있는 곳이다. 이 왕좌는 대국의 상징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악바르의 ‘영광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의 전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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