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경제성장 뒤안길 속 원양어업
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원양에서 선박의 위치를 측정할 때는 육분의(六分儀, Sextant)를 이용하여 태양, 달과 별의 고도를 측정하고, <214TABLE>이라는 책자를 이용하여 계산을 마치고 나서 다시 위치기입도(Floating Sheet)에 삼각자를 대고 선을 그려 2개 이상의 만나는 점, 곧 선박위치를 표시하기까지 30여분이 걸렸다. 또한 기상정보를 팩스로 수신할 수 없어, 통신사가 기상국으로부터 모르스부호로 보낸 정보를 취합한 후 기상도에 그려서 태풍의 진로나 돌풍 등을 예상하였다.?
필자가 1등항해사로 승선하던 중, 대서양의 Azores군도 부근 어장에서 조업할 때였다. 태풍발생 예상지역 인근으로 기압이 계속 떨어지고, 바다가 호수같이 잔잔하여(태풍의 중심일 경우에 해당되는 기상상태임) 매우 긴장한 상태에서 양승(바다에 늘어트린 줄 및 낚시를 감아올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저녁 무렵이 되어 수평선이 새까맣게 변하는가 싶더니, 여러 길 되는 높이의 파도가 쓰나미처럼 선박을 집어 삼킬듯이 덮쳤다. 바로 이론으로만 배웠던 삼각파도였다. 배는 조선능력을 상실했으며, 그야말로 죽을 고비를 넘겼고 어구도 많이 분실했다.?
기상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천측이 불가해서, 추측위치로 조업을 하는데, 기상이 회복된 후 확인하면 실질위치와 약 60마일(약 110km)정도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도 며칠간의 악천후로 선박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발생된 일로, 요즘 같으면 모든 선박에 GPS가 설치되어 있고, 기상정보도 정확해 태풍을 만난다면 무능한 선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태풍 전후로 영양염류가 증가하여 고기가 많이 잡히니 피항하기보다는 무리하게 조업을 하는 경우가 있어 대형사고로 이어지기도 했다.?
과거에는 어른 키 크기의 조타기가 마도로스의 도전과 힘, 그리고 낭만의 상징이었는데, 요즘은 기계식에서 유압식으로 바뀌면서 자동차 운전대 크기 정도로 축소됐다. 또한 항해계기와 제반 기기가 자동화되어 이제는 승선인원도 감소한 반면, 선박사고는 줄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는 아마도 해기사들의 자질 및 정신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배를 타면 육상근로자보다도 급여가 월등해서, 대학의 수산학과는 전국 각지의 이름 있는 고등학교 출신 지원자가 많을 정도로 인기학과였다. 더욱이 4년간의 NROTC(해군예비장교훈련단) 과정을 이수하면 해군에서 필요한 인원을 제외하고는 예비역 소위로 전역을 하므로, 나이 어린 선장도 많았다. 이후 직업의 다양화와 함께 근로여건 개선 및 근로인권 향상 등으로 육상근로자의 급여차이가 줄어드는가 싶더니 오히려 역전됨에 따라, 요즈음은 지원자가 거의 없다고 한다. 이제는 종합대학(부산수산대학에서 부경대학교)으로 탈바꿈을 한 모교를 보니 격세지감이 든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5대양의 거친 파도를 헤치며, 젊음을 바친 ‘배 사나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세계 제1의 조선국이 될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원양어업은 이제 경제성장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지만 그들의 자부심만큼은 오히려 해가 갈수록 또렷이 빛나고 있다.?
*글쓴이 이완식은 국립부산수산대학교 어업학과(현재 부경대학교)를 졸업한 뒤 10여 년 동안 원양어선 선장으로서 전세계를 항해했다. 이후 사조산업, 영국법인 INFITCO 등에서 근무했으며 엘림수산 대표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