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 ‘구리왕’ 무혐의 판정···납세자 인권은 ‘무대책’

국세청이 특정 납세자의 확정되지 않은 세금 탈루 관련 정보를 언론에 흘려 이를 접한 국민들의 ‘반(反) 부자정서’를 지렛대로 세금 추징을 밀어붙인 것으로 드러나 이를 시급히 근절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세청의 이런 관행은 특히 최근 과세전 적부심에서 과세요건에 못 미쳐 무리한 과세임이 드러난 세칭 ‘구리왕’ 사건을 통해 10일 밝혀졌다. 또 비납세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이번 사안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 역시 납세자인권을 침해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납세자연맹(회장 김선택)은 “국세청은 ‘역외 탈루세금 추징실적 거양’ 차원에서 현행 한국 세법상 비거주자에 해당되는 ‘구리왕’을 상대로 무리한 과세를 추진했다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납세자연맹은 “국세청이 ‘구리왕’에 대한 고액의 과세를 추진하면서 언론에 이런 사실을 흘린 것은 고소득자나 자산가에 대한 반감을 활용해, 법절차에 따라 탈세 여부가 판명나지 않은 납세자를 ‘명예살인범’으로 몰아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이번 과세는 애초부터 논리와 근거가 박약한 ‘무리한 과세’였다는 것이 납세자연맹 주장이다. 과세전적부심사위원회 위원 11명 중 국세청 입장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국세청 직원 5명을 제외한 외부위원 6명 전원이 과세내용이 부당하다고 판단한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는 것.

현행법상 법원에서 납세자가 승소 때 소송비용 일부가 보상되는 반면 이번 ‘구리왕’의 경우처럼 소송전단계의 세무대리인 비용은 보상이 안 돼 납세자가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고액의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것도 불합리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번 사건의 경우 ‘구리왕’은 과세전 적부심을 대리한 회계법인에?성과보수는 별도로 시간당 자문비 총액 상한액 30여억 원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랍 26일 역외 탈세 혐의로 4100억원을 추징당한 ‘선박왕’도 국내 유수 로펌에 법률자문과 소송대리 등을 위한 착수금조로 100억원을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이 마음만 먹으면 특정인에 대해 세금을 부과해 경제적 불이익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국세청은 더욱이 ‘구리왕’의 사례를 ‘국세징수법 제14조 납기 전 징수사유’로 간주해 세금 고지에 앞서 국내재산을 압류한 것으로 전해졌다. ‘구리왕’은 이에 따라 압류에 따른 재산권행사가 제한되는 피해를 입었다.

국세청의 무리한 세금 부과와 함께 언론보도로 실추된 ‘구리왕’의 명예와 인권이 보상받기 어려운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언론사 스스로 2001년 국세청 세무조사과정에서 ‘확정되지 않은’ 탈세혐의로 사회적 비난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한 신문사 사주의 부인이 자살하는 극단적 사태도 겪은 바 있다. 하지만 여전히 탈세보도에 관한 사회적 책임 규준이 없어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밝히고 있다.

납세자연맹 김선택 회장은 “탈세혐의를 벗은 ‘구리왕’을 비롯해 최근 주목받는 ‘선박왕’을 보면 지난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 당시 무가지를 광고선전비가 아니라 접대비로 보아 조세심판원에서 과세가 취소된 경우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은 “재산권은 국민의 중요한 인권이다. ‘죄형법정주의’나 ‘무죄추정의 원칙’처럼 피의자 인권 보호의 관점이 똑같이 적용되는 가운데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보도돼야 한다”면서 “한국언론의 탈세보도 태도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규준’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세금 탈루를 포함한 납세자 정보를 언론 등에 유포하는 공무원을 가중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공무원은 당초 조세범처벌법에 따라 가중 처벌받았지만 지난 2009년 관련 조항이 삭제돼 다시 같은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연맹은 부당한 과세처분이 취소되면 부과한 세무공무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고, 세무대리인비용도 전액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번 사례와 같이 잘못된 세금부과임이 명백한 경우에는 납세자가 세무공무원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할 수 있도록 입법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통상적 세금징수 목적을 벗어나 정치적 목적 혹은 업무실적 및 진급 등 공익 이외의 세무조사권 행사가 적발되면 이에 가담한 세무공무원과 이를 지시한 고위공직자 및 정치권 인사에 대해 형사처벌토록 하는 규정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김선택 회장은 “미국처럼 ‘국세청 감독위원회’를 도입해, 정치적 이유 등으로 하는 세무조사 및 과세를 할 경우 그에 따른 과세처분을 무효화하는 입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리왕은 누구?

‘구리왕’ 차용규(56)씨는 삼성물산 독일주재원으로 근무하던 1995년 카자흐스탄 최대 구리 채광·제련업체인 카작무스의 위탁 경영을 맡은 뒤, 2년만에 흑자로 전환시켰다. 2000년 삼성물산은 카작무스 지분 45%를 인수해 최대주주가 됐고, 차씨는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4년에 삼성물산이 카작무스에서 손을 떼자 차씨는 주식을 대거 인수한 뒤 2005년 런던 증권거래소에 상장시켰고, 이듬해 카작무스 지분을 모두 팔아 1조원대의 차익을 남겼다. 2008년에는 재산 14억달러(약 1조4000억원)로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부자 랭킹 843위에 이름을 올렸다.

차씨는 조세피난처인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설립한 법인을 통해 국내 부동산과 주식 등에 4000억원 안팎을 투자했고, 부인이 한국에 자주 드나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