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16일은 부마민주항쟁 제47주년 국가기념일이다. 1979년 이날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반유신 시위는 시민들의 참여로 확대됐고, 18일 마산으로 번졌다. 정부는 18일 0시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투입했다. 이 기사는 부마민주항쟁 47주년을 맞아 아시아엔은 당시 부산에 파견된 해병대 제73대대 대대장이었던 이재돈 예비역 장군을 인터뷰했다. <편집자>
“돌을 맞더라도 시민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유신체제 반대 시위는 부산 시내로 번졌고 이틀 뒤 마산으로 확산됐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투입했다. 부마민주항쟁은 10·26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로부터 47년이 지난 2026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을 맞아 당시 부산에 파견됐던 해병대 지휘관의 구술 증언을 소개한다. 해병대 제1사단 제7연대 73대대를 지휘했던 이재돈 예비역 소장이다.
이 장군은 최근 필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1979년 10월 부산으로 출동한 해병부대의 이동과 배치, 시민과의 접촉, 장병들에게 내린 지침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가 반복해 강조한 원칙은 하나였다. “군인은 적을 향해서는 용감해야 하지만 시민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러 간 군대가 국민을 다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급박했던 부산 출동…대대장 교대식도 부산시청에서
이 장군은 당시 포항 해병대 제1사단에서 작전상황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부대 출동이 결정되자 병력 이동과 상황을 확인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는 제73대대장으로 보직을 옮길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출동으로 예정된 교대식이 연기됐다.
“내가 대대장으로 교대하기 전에 부대가 먼저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급하게 출동하다 보니 교대식도 못 했지요. 나는 당시 작전상황실에서 내려가는 부대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출동 과정에서 불의의 차량 사고도 발생했다. 이 장군에 따르면 부산으로 이동하던 해병대 차량이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해 장교를 포함한 장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의 급박한 이동 상황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이 장군은 부대가 부산에 배치된 뒤 현지에서 대대장 지휘권을 인수했다고 밝혔다. “부산에서 대대장 교대식을 했어요. 부산시청에서 진행했는데 시장도 참석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1979년 10월 하순이었다.
부산시청에 대대본부…23개 주요 시설에 병력 배치
이 장군에 따르면 당시 부산에 파견된 해병대 제7연대(연대장 박구일 전 국회의원)는 여러 임무를 나누어 맡았다. 일부 병력은 항만 경계를 담당하고, 일부는 예비대로 남았으며, 제73대대는 부산 시내 주요 시설의 경비를 맡았다.
제73대대 본부는 부산시청에 설치됐다. “우리가 맡은 주요 시설이 23군데였습니다. 부산시청을 본부로 두고 방송국과 신문사, 우체국, 발전시설, 교도소, 대학, 기차역 등에 병력을 배치했어요.”
그가 기억하는 주요 경비 대상에는 KBS와 MBC, 부산일보와 국제신문, 부산우체국, 부산역과 부산진역,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 등이 있었다. 방송·통신·교통시설뿐 아니라 대학과 교도소까지 계엄군의 경비 대상이 됐다는 사실은 당시 부산이 어떤 통제 아래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장군은 부산에 파견된 해병대와 공수부대가 담당 지역을 나눴으며, 자신의 대대는 부산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임무를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병력이 분산 배치되자 지휘관에게는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멀리 떨어진 초소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이 시민들과 충돌하지 않도록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돌을 맞더라도 시민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마라”
이 장군은 대대장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장병들의 무력 사용을 억제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군대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토를 방위하기 위한 것 아닙니까. 시민을 보호하러 가서 시민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는 장병들에게 시민과 불필요한 접촉을 하지 말고, 시비가 생기더라도 무력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시민이 와서 시비를 걸더라도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돌을 던지면 맞더라도 보복하지 말라고 했어요. 군인이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는 것과 시민을 상대로 무력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대화를 하다가도 다툼이 벌어질 수 있다고 판단해 경계근무 중 시민과 불필요하게 말을 섞지 말라는 지침도 내렸다. “시민이 말을 걸더라도 함부로 대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을 주고받다 보면 감정이 상하고 충돌할 수 있거든요. 총을 꺼내 든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음주 역시 엄격히 제한했다고 한다. 장병들이 분산 배치된 상황에서 작은 일탈이 큰 사고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장군은 밤낮으로 여러 경비 초소를 직접 돌며 근무 상태를 확인했다고 회고했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해병대는 왜 강하게 진압하지 않느냐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인터뷰 도중 이 장군은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에 관한 이야기도 꺼냈다. “나중에 연대장을 통해 들은 이야기인데, 차지철이 해병대가 왜 강하게 대응하지 않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상급 지휘계통에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직접 확인할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대대장은 전술 지휘관입니다. 위에서 정치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다 알 수 없어요. 내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부대 안에서 어떤 지시를 내렸고 장병들이 어떻게 행동했느냐는 것입니다.”
이 장군은 당시 계엄 지휘체계와 정치권 내부의 논의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범위 밖의 일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다만 차지철 경호실장이 유신체제 말기 시위 진압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점을 고려하면, 연대장을 통해 전해 들었다는 그의 증언은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시민들이 전해 준 위문품과 책…주둔지에서 도서실까지
이 장군이 기억하는 부산 주둔 생활에는 뜻밖의 장면들도 남아 있다. 장병들이 근무지 주변을 청소하고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진화에 참여하면서 시민들이 위문품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부산 시민들이 위문금과 위문품을 많이 보내 줬어요. 생선도 가져오고 돼지 고기도 가져왔습니다. 신문에도 우리가 청소하거나 불을 끈 이야기가 실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부산일보와 국제신문에 관련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 장군은 장기간 흩어져 근무하던 장병들의 생활을 관리하기 위해 독서와 체육활동을 장려했다고도 말했다. “병사들이 가만히 있으면 별생각을 다 하게 되지요. 술을 마시거나 사고를 칠 수도 있고요. 그래서 책을 읽게 하고 운동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교육청에 책 지원을 요청했고, 학교 등을 통해 수천 권의 책을 제공받았다고 회고했다. 장병들이 근무 중인 곳에 책을 나누어 주고, 여가시간을 건전하게 보내도록 했다는 것이다.
부산 주둔을 마치고 원대로 복귀한 뒤에는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부대 도서실도 설치했다. “대대에 도서실을 만들었어요. 사단장과 연대장이 참석한 개소식 사진도 남아 있습니다. 장병들이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그는 부산 주둔 당시 받은 위문금과 물품, 장병들의 교육과 생활 관리 경험이 부대 운영에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1980년 2월 4개월만에 복귀…“지휘관의 원칙이 중요했다”
이 장군의 기억에 따르면 해병대 제1사단 7연대 제73대대는 1979년 10월부터 1980년 2월 말까지 약 4개월 동안 부산에 주둔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부대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관의 일관된 원칙이었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지휘관이 확고하게 지시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병사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그 원칙을 지키도록 해야 하지요.”
당시 장병들 가운데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군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장군은 전쟁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시민에게 강압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군인의 용기는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았다. 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순간을 판단하고, 자신과 부하들을 통제하는 것도 지휘관의 책임이라는 뜻이었다.

부마민주항쟁 47주년, 군인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유신체제에 저항한 부산과 마산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이다. 당시 비상계엄 선포와 군 투입은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억누르려 했던 국가권력의 대응이었다.
그 역사적 사실과는 별도로, 계엄군 내부의 개별 지휘관들이 어떤 판단을 했고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를 기록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재돈 장군의 증언은 당시 국가권력의 결정 과정 전체를 설명하는 자료는 아니다. 본인도 상급 지휘부의 논의와 명령을 모두 알지는 못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부산 시내에 배치된 해병대 대대의 지휘관이 어떤 원칙으로 부하들을 통제하려 했는지 보여주는 구술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시민과 군인이 맞서게 되는 상황에서 지휘관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명령을 수행하는 군인에게도 지켜야 할 원칙은 있는가.
47년 전 부산에서 군 지휘관으로 근무했던 노병의 대답은 분명했다. “적에게는 용감해야 합니다. 하지만 시민에게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군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러 갔다면, 끝까지 그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부마민주항쟁 47주년을 맞아 되새겨야 할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로 나섰던 시민들의 용기와 함께, 국가권력이 무력을 동원할 때 지켜야 할 한계와 책임이다. 그 책임은 47년 전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