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기의 사람읽기’는 한 사람의 삶과 일, 일상의 언어를 통해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는 연재다. 이번에는 보안용품과 반디펜을 개발하고 발효식품 사업으로 활동을 넓혀온 김동환의 삶을 다룬다. 필자가 30년 가까이 지켜본 인연과 당사자의 회고, 직접 주고받은 글과 메시지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편집자>
김동환의 어머니는 아들을 서울로 보내며 말했다. “욕먹는 짓 하지 마라.” 칭찬을 얻으라는 말보다 잘못을 삼가라는 당부를 앞세웠다. 아들은 훗날 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중동에서 트럭을 몰고, 발명품을 만들어 여러 나라에 팔았다. 식품을 만드는 사람이 된 뒤에도 어머니의 말을 기억했다.
어머니 노순애 여사는 방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어린 아들을 함열역까지 배웅했다. 옷에 묻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당부했다고 한다. 김동환은 2024년 가을 내게 보낸 글에 그 장면을 적었다. 식품업을 하는 자신의 좌우명이 거기서 나왔다고 했다.
그는 넉넉한 농가의 막내아들로 자랐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았고, 중학교에 다닐 무렵 집안 형편이 기울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으나 (부모의 이혼으로 집안이 어려워져) 끝내 학업을 중단했다. 삼선교 시장에서 채소를 배달하고 아현시장에서는 달걀을 팔았다. 어머니와 함께 새벽 인천 연안부두에서 떡을 팔기도 했다.
또래 학생들이 지나가면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고 한다. 학교에 있어야 할 사춘기 나이에 시장에서 생계를 구했다. 물건을 나르고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넉넉했던 집안의 막내아들이 누리던 생활은 멀어졌다.

중동에서 모은 돈, 첫 사업에서 잃다
청년이 된 뒤에는 택시를 몰았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지도책을 펼쳐놓고 길을 찾았다. 어느 날 승객이 그의 모습을 눈여겨보고 명함을 건넸다. 찾아오라는 말에 응했고, 그 인연으로 운전기사 일을 했다. 이후 삼환기업에 취직할 기회를 얻었다.
1983년부터 2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서 덤프트럭을 몰았다. 돈을 모아 귀국한 뒤에는 시대를 크게 앞선 택배업으로 1985년 내 사업을 시작했다. 서울 공덕동에 사무실을 열고 직원들과 액세서리 수출에도 나섰다. 그러나 거래처를 확보하지 못했다. 반년 만에 모아온 돈을 잃고 다시 버스를 운전하고 정수기를 팔았다.
1987년 친구의 권유로 가스총 판매를 시작했다. 보안용품 수요가 늘던 때였다. 판매 수익으로 기반을 마련하고 금속탐지기와 차량검색기 등으로 사업을 넓혔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관련 시장도 커졌다.
장사가 자리를 잡자 직접 물건을 만들고 싶어졌다. 방검조끼와 수갑 등 보안용품 개발에 나섰다. 남이 만든 제품을 가져다 팔던 사람이 자기 생각을 제품에 담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번 해봅시다”, 반디펜에 불을 밝히다
그를 널리 알린 반디펜도 현장에서 본 불편에서 나왔다. 밤에 교통경찰관이 손전등을 목과 어깨 사이에 끼운 채 단속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다. 펜에서 불이 나오면 손전등 없이 글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992년부터 개발을 추진했다. 핵심은 볼펜심이 통과하도록 발광다이오드, 즉 LED의 중앙에 구멍을 내는 것이었다. 기술자들은 빛을 내는 소자가 중앙에 있어 구현하기 어렵다고 했다.
김동환은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다녔다. 이듬해 말 아남그룹 김흥수 회장을 만났다. 김 회장은 어렵다는 설명을 듣고도 “그래도 한번 해봅시다”라고 말했다. 아남내쇼날전기의 한영수 팀장에게 개발을 맡겼고, 오랜 시행착오 끝에 시제품이 완성됐다.
김동환은 그날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한영수 팀장과 서로 부둥켜안고 기뻐한 뒤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머릿속에 있던 물건이 눈앞에서 작동했다. 착상을 낸 사람과 그것을 구현한 사람이 함께 기뻐했다.
반디펜은 국내 경찰에 납품됐고 해외에도 나갔다. 국제발명전시회에서 상을 받았다. 시장에서 채소를 배달하던 사람이 자신이 만든 펜을 들고 세계시장에 서게 됐다.
그러나 성공한 제품에도 손실이 따랐다. 일본에 납품한 반디펜이 인쇄 불량으로 대량 반품됐다. 김동환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 비행기가 떨어지면 내일을 맞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울었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막막했던 순간이었다. 제품을 발명한 뒤에도 생산과 검수, 납품의 책임이 남아 있었다.
도로표지병 개발에 큰돈을 투자했다가 자금난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건물을 팔았다. 반디펜의 성공으로 얻은 자신감이 다음 사업의 성과까지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관객의 호응을 빛으로, 야광봉을 만들다
그는 다시 제품을 만들었다. 2002년에는 공연장과 행사에서 관객이 흔들며 호응할 수 있는 야광봉을 개발했다.
김동환은 ‘일고수 이명창(一鼓手 二名唱)’이라는 말을 새겼다고 했다. 소리꾼의 노래만큼 장단을 맞추는 고수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을, 공연을 완성하는 관객의 역할로 넓혀 생각했다. 그는 여기에 ‘일관객 십명창(一觀客 十名唱)’이라는 말을 붙였다.
“야광봉을 흔들어 관객이 호응하면 가수는 더 잘했고, 가수가 더 잘하면 관객도 더욱 호응했습니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교보문고라는 생태계가 존재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제품이 가수와 관객의 호응을 돕고 K팝 공연문화에 보탬이 됐다는 데 자부심을 나타냈다. 주문이 늘면서 생산시설도 증설했다.
한 사업에서 얻은 돈을 다른 사업에서 잃고, 새로운 물건을 들고 다시 시장에 나서는 일은 그의 삶에서 반복됐다. 실패한 뒤에도 다음 제품을 궁리했다.
볼펜에서 발효식품으로, 먹거리를 연구하다
이후 그의 관심은 국민 건강의 바탕이 되는 먹거리, 그린푸드로 옮겨갔다. 볼펜과 보안장비를 만들던 사람이 발효와 숙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맛을 유지하면서 나트륨을 줄이는 방법을 찾았다. 멸치와 쌀, 콩 등을 재료로 연구를 이어가며 저염 조미료와 고추장 등을 개발했다. 2011년에는 연구개발과 생산을 위해 젓갈로 이름난 강경이 있는 충남 논산으로 사업 기반을 옮겼다.

식품기업 가이아를 이끌면서 그가 자주 꺼낸 말은 소비자의 건강이었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제품을 만들고 판매했다고 해서 제조업자의 책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당부를 다시 적었다. “욕먹는 짓 하지 마라.” 어린 시절의 기억을 식품을 만드는 사람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했다.
2023년에는 한국그린푸드사업협동조합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나트륨과 당, 열량을 줄이고 단백질을 보강하며 첨가물 사용을 최소화한 식품을 여러 기업이 함께 연구하고 생산·유통하는 길을 찾았다. 개별 제품의 개발에서 공동의 시장을 만드는 일로 관심을 넓혔다.

그 무렵 내게 보내온 메시지에는 유통과 제도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소비자가 찾지 않으면 팔리지 않고, 유통업체가 취급하지 않으면 소비자를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제조업체가 참여할 이유와 소비자가 선택할 이유를 함께 마련하(는 생태계를 만들) 고 싶어 했다.
슬로푸드와 문화유산을 지키는 활동에 회비를 낸다는 이야기도 했다. 사라져서는 안 되는 맛과 종자가 있고, 보존해야 할 문화가 있다고 여겼다. 건강의 바탕이 되는 먹거리를 선택하는 일이 소비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연스럽게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품과 판로는 그의 기대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2024년 10월에는 저염 자장 제품에서 냄새 문제가 발생해 출하를 중단했다고 알렸다. 원인을 해결하고 새 출하 일정을 잡는 중이었다. 편의점에 고추장을 납품할 계획도 전했지만 아직 확정 전이라고 적었다.
그의 메시지에는 기대와 일정 연기가 번갈아 나타났다. 방송을 통해 제품을 알리고 싶다고 했고, 납품 시기에 맞춰 준비할 일을 의논했다. 개발한 제품을 소비자에게 보내기까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계속 생겼다.
기업회생의 문턱, 경영자의 마음을 돌아보다
그 뒤 가이아는 경영 위기에 놓였고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갔다. 김동환은 출입국 당국의 단속 과정에서 생산과 거래에 큰 타격을 입었다고 호소했다. 단속의 적법성과 경영 악화의 원인은 관련 자료와 당사자들의 설명을 따져 기록할 일이다. 그 시기 내게 보낸 메시지에는 회생 신청을 앞둔 그의 고민이 남아 있다.
그는 회생 신청만은 피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피하지 못했다고 했다. 비슷한 어려움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알고 싶어 책을 찾아봤다고도 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결정에 도움이 될 경험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직접 겪은 일을 써보라고 권했다. 그는 실패가 포기는 아니라며 <갈 때까지 가봤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발명으로 성공한 이야기뿐 아니라 회생을 앞두고 망설였던 과정, 판단을 내리는 데 필요했던 것, 어려움을 겪고 달라진 생각을 남기려 했다.
지난 8월 15일 저녁 그와 통화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밝았다. 김과 발효, 단백질과 아미노산, 앞으로 개발하고 싶은 식품 이야기가 이어졌다. 겨울에 김이 나오면 새로운 발효 실험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날 그는 ‘회복탄력성’을 이야기했다. 공이 땅에 부딪혔다가 다시 튀어오르듯 사람도 충격을 받은 뒤 일어설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힘든 시기에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던 경험도 말했다. 기업 경영과 회생 과정을 이해하는 전문적인 심리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업이 어려워지면 자산과 부채를 따지고 법률과 회계를 검토한다. 김동환은 그 과정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영자의 마음도 살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겪은 고통에서 나온 제안이었다.
다시 제품을 내놓고, 손님의 판단을 기다리다
나는 그를 30년 가까이 지켜봤다. 새 제품을 설명하던 때도 있었고, 생산과 거래가 막혀 어려움을 호소하던 때도 있었다. 무엇을 만들었는지 이야기하다가 무엇을 더 만들고 싶은지로 화제가 옮겨가곤 했다. 새로운 생각이 언제나 수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개발을 계속했다.
그의 삶에서 사람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 택시 승객과의 만남이 취업으로 이어졌고, 김흥수 회장과 한영수 팀장의 협력이 반디펜을 제품으로 만들었다. 자기 생각을 밀고 나간 시간 곁에 다른 사람의 판단과 기술이 있었다.
지금도 그는 김 회장의 “한번 해봅시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어떤 시나 웅변보다도 자신을 감동시킨 말이라고 한다. 모두가 어렵다고 할 때 시도할 기회를 열어준 한마디였다.
올해 추석에도 그는 나와 주고받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10월 초에는 제품 사진을 보내왔다. 용량을 설명한 뒤 얼마라면 구매하겠느냐고 물었다. 시장에서 손님 앞에 섰던 사람이 오랜 세월 뒤에도 손님의 판단을 구하고 있었다.
뜻은 제품과 약속으로 증명된다
나는 김동환이 성취를 얻던 때와 손실을 겪던 때를 함께 보았다. 발명의 재주가 있었으나 그 재주가 모든 사업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도움을 받아 길을 열었고, 자기 판단으로 손실을 입기도 했다. 회생에 이른 뒤에는 자신에게 필요했던 지원을 돌아보고 그 경험을 글로 남기려 했다.
그의 뜻을 귀하게 여기되 뜻만으로 성패를 판단할 수는 없다. 제품은 품질로 평가받고, 기업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 다시 일어서겠다는 말의 무게도 앞으로 하는 일에서 드러날 것이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옷에 묻지도 않은 먼지를 털어주며 욕먹을 일을 삼가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오래 쌓은 성취도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계하는 당부로 읽는다. 식품을 만드는 사람이 된 아들에게는 소비자의 건강을 해칠 일을 삼가라는 기준으로도 남았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그린푸드의 취지도 일상의 먹거리에서 건강을 지키자는 데 닿아 있다.
김동환은 그 말을 기억한 채 오늘도 새 물건을 내놓고 사람들의 판단을 기다린다. 그의 생애는 여기까지 왔다. 그다음 행적을 기록할 날을 기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