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끝자락 즈음이 되면 우리는 봄의 소리를 듣는다.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보낸 엽서처럼 봄은 우리에게 전령을 보낸다. 어느 날 강남 갔던 제비가 푸드득 처마 밑을 파고들고, 앞 강의 살얼음이 채 녹지도 않았는데, 그래서 기대도 하지 않고 있는데,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가 기지개를 켜고 뛰어오르고, 아직 길섶과, 화단에 잔설(殘雪)이 다 녹지 않았는데, 어느새 목련이 터질 듯 부풀어 있다.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칩(驚蟄), 그리고 춘분(春分)까지 봄의 절기가 다 지났는데도, 요 며칠 두툼한 외투를 다시 걸치며 당(唐)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虯)의 시,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을 읊조렸었는데, 자연은 기후가 어떻든 상관없이 봄의 전령을 보내 충직하게 섭리(절기)를 지킨다.
한낮에 동네를 걷는데, 시국이 하 수선하여 그럴까, 찬바람이 더욱 세차게 느껴져 잔뜩 움츠리는데, 아파트 담장 화단 옆에서 오가던 어른, 아이들이 하늘을 향해 스마트폰을 대고 열심히 찍는다. 언제 터졌는지 벚꽃이 피었다, 아직 만개는 아니지만 벚꽃답게 화사하기 이를 데 없다. 며칠 전에 터진 목련, 개나리, 산수유가 아름답다며 너도나도 카메라로 담았었는데, 벚꽃을 보니 역시 자태가 다르다.
남녘은 벌써 벚꽃이 만개해서 진해 군항제가 열렸다고 하는데, 이곳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는 응달진 곳은 아직 벚꽃 봉오리가 터지지도 않았다. 많이 늦다. 그래서 양지 바른 도로 옆 벚꽃이 더욱 각광을 받는다.
벚꽃을 보면 20여 년 전의 일화가 떠오른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였다. 어느 날 동료 기자들과 오찬을 하고 다시 청와대로 돌아오는데, 정문 옆으로 쭉 뻗은 돌담 아래 나이 든 관광객 수십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느 나라든 다 그렇지만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곳은 최고의 관광명소다. 청와대도 예외가 아니어서 봄, 가을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봄에 관광하는 인파를 상춘객(賞春客)이라 한다. 상춘은 봄을 즐긴다는 뜻이다. 청와대 앞 상춘객 옆을 지나치는데, 한 할머니가 소리친다. “야들아! 청와대에 사꾸라가 참 많다~~” 완전 경상남도 억양이다. 우리 일행은 그 말을 듣자마자 서로 마주 보며 박장대소를 했다.
사쿠라(櫻さくら)는 벚꽃의 일본 말이다. 청와대 앞 도로 주변에 길게 벚꽃들이 만발한 것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귀에는 벚꽃 사꾸라가 아니라, 다른 사꾸라를 연상한 것이다. 못된 속셈을 가지고 다른 사람, 다른 당과 야합하는 정치인을 뜻하는 은어(隱語) 사꾸라로 들린 것이다. 청와대에 그런 세작(細作) 같은 사쿠라가 많다고 외치는 것 같아서 그 묘한 뉘앙스에 자지러진 것이다.
일본어로 벚꽃을 의미하는 단어 사쿠라가 왜 한국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까? 정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가장 설득력을 가진 것이 일제강점기 당시, 벚꽃(사쿠라)이 일본을 상징하는 꽃이다 보니, 일본에 동조하는 친일파(매국노)를 사쿠라로 불렀다는 해석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도 유래하면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위선자, 배신자를 의미하는 은어로 사용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일본 말에 비슷한 어원의 사쿠라니쿠(さくらにく桜肉)가 있다. 그 뜻은 말고기다. 말고기의 색깔이 벚꽃과 비슷한 연분홍빛을 띤다. 이 때문에 소고기인 줄 알고 먹었다가 말고기였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것이 훗날 “겉보기는 비슷하지만 다른 것”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특히 정치 쪽에서 많이 인용되면서 “정치환경이 바뀌면서 조직을 버리고 변절하는 정치인”을 ‘사쿠라’라고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사된 것을 보면 그 외에도 어원에 관한 가설이 있는데, 무엇이 정설인지는 꼭 집어놓은 것이 없다.
우리 정치사에서는 1964년 8월 언론윤리위원회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1차 진산파동이 벌어졌을 때 사꾸라 발언이 나왔다. 당시 윤보선 의원은 언론윤리위법안이 통과되자 유진산 의원이 거액의 돈을 받는 등 박정희 정권과 내통했다며 ’사쿠라‘를 당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언론윤리위법안’은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학생시위를 보도하는 언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나머지 국회 상정한 법안이었다.
또 다른 경우는, 2023년 12월12일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의원의 ‘사쿠라’ 발언이다. 김민석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낙연 신당론은 윤석열 검찰 독재의 공작정치에 놀아나고 협력하는 사이비 야당, 즉 사쿠라 노선이 될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낙연 전 대표는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며 신당 창당 가능성을 제기해 왔었다.
이렇듯 변절자란 뜻의 사쿠라가 오히려 한국에서 더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런데 아직도 벚꽃이 일본 국화(國花)라고 믿고 있는 한국인들이 많다. 자료를 찾아보니 벚꽃은 일본 국화가 아니라 한다. 일본은 한 번도 자국의 국화(國花)를 법으로 정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꽃이 벚꽃이라 다들 일본 하면 벚꽃을 생각하게 되는 관습상의 국화로 인정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국화(菊花)가 일본 황실의 상징으로 여권 등에 쓰이지만 그것도 공식적인 국화는 아니란 것이다.
우리나라에 벚꽃은 언제부터 왕성해졌을까? 조선시대까지 꽃구경에서도 최고의 꽃으로 쳐주는 건 복숭아꽃, 복숭아꽃 다음으로 살구꽃이었다고 한다. 복숭아꽃으로 유명한 곳이 북둔, 오늘날의 성북동 일대였고 복숭아꽃이 피는 시기이면 이곳으로 꽃구경을 온 것이다. 그리고 살구꽃으로 유명한 곳은 행촌동 근처의 필운대(弼雲賞)였다. 그러다가 꽃구경의 대상이 벚꽃으로 바뀐 건 일제강점기 이후였다. 그러나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벚꽃이 있었다. 제주도가 원산으로 벚꽃의 한 종류인 왕벚꽃 나무가 있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굳이 벚꽃에 대한 선입견은 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냥 아름다운 봄꽃으로 보고 즐기면 좋을 것 같다. 이미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진해 군항제는 못 가지만 잠실 석촌호수 벚꽃축제는 올해도 가볼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