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 형님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저의 가슴 속에는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래서 예전 1986년 7월 5일 새벽, 저에게 직접 써보내신 편지를 꺼내봅니다.
형님께서는 ‘지하’란 이름의 무게를 대단히 힘들고 불편하게 생각하신 듯합니다.
그 이름으로 썼던 여러 시작품들, 그 이름 때문에 겪었던 온갖 고초와 박해의 시간들, 그것으로부터 훨훨 벗어나 홀가분한 자유의 시간을 갈망하셨습니다.
한 인간에게 짐 지어진 이름의 굴레는 너무도 거추장스럽고 무거웠습니다. ‘김지하’라는 이름에게 요구하는 대중들의 강박은 몹시도 거북하고 불편했지요. 그래서 본명 ‘김영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소원을 생시에는 이루지 못하고 사시다가 별세 후 드디어 본명 ‘김영일’을 회복하셨네요. 빈소의 영정사진 밑 ‘김영일’이란 이름이 오늘 따라 한층 빛나는 광채로 느껴집니다.
형님께서는 당신의 장례식을 제가 살고 있던 충북 청주에서 하고싶어 하셨고 그 장례식의 조사를 저에게 쓰라고 그토록 이르셨건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네요.
드디어 ‘김지하’라는 허명에서 벗어나 본명 ‘김영일’로 돌아간 형님! 사진 앞에 서서 눈을 감고 명복을 빕니다.
1985년 그 뜨겁던 여름, 청주의 전채린 교수 댁 거실에서 윤구병, 김성동 둘을 심판으로 앉혀놓고 형님과 둘이 마주 앉아 꼬박 밤을 새며 무려 8시간 동안 노래시합을 펼치던 그날 밤의 뜨겁던 분위기가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형님의 고향 목포 유달산 자락에 와서 이 아침 저는 슬픈 조사를 써서 바칩니다.

다시 말한다.
<김지하>는 죽었다.
이제부터 나를 <김영일>이라 불러다오.
언제일런지 모르지만
장례식은 청주(淸州)에서 하자.
조사(弔詞)는 네가 써다오.
1986년 7월 5일
새벽 4시 35분
김 영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