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칼럼

[윤재석의 시선] 한글날 다시 기억하는 헐버트 박사

한글의 가치를 알리고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한 호머 헐버트(1863~1949).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을 맞는 오늘, 성군(聖君) 세종대왕께 거듭 감사하게 된다.

한글은 창제 원리가 뚜렷하고 체계적인 문자다. 배우고 쓰기 쉬운 특성 덕분에 오늘날에는 외국인들도 한글과 한국어에 관심을 갖고 다가온다.

오랫동안 ‘언문(諺文)’이라 불리며 공식적인 문자 생활에서 한문보다 낮게 평가받던 한글이 오늘처럼 널리 쓰이기까지는 수많은 사람의 기여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이가 호머 헐버트 박사다.

미국 버몬트주 출신의 교육자이자 선교사이며 한국의 언어와 역사를 연구한 그는 1886년 조선 정부가 설립한 근대식 관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입국했다.

빠르게 한국어를 익힌 그는 더 많은 사람이 세계의 지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순한글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술·간행했다. 한문을 모르는 사람도 새로운 지식을 접할 수 있도록 한글로 책을 쓴 것이다. 책 이름에도 선비와 백성이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헐버트는 한글의 구조와 장점을 영어로 소개하는 데도 힘썼다. 1892년 영문 월간지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에 ‘한글(The Korean Alphabet)’이라는 글을 발표해 한글의 체계와 효용을 논했다.

한글을 읽기 쉽게 쓰는 방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배재학당에서 인연을 맺은 주시경 등과 교류하며 한글 연구와 보급에 힘을 보탰고, 띄어쓰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오늘날의 한글 표기법이 헐버트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띄어쓰기는 앞선 외국인들의 한국어 교재에서도 사용됐으며,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후 주시경과 후학들의 연구,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거쳐 맞춤법과 띄어쓰기 규정이 정비됐다. 헐버트의 공로는 이 과정에서 한글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활용과 보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데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은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한 활동이다. 그는 <독립신문> 창간을 지원했고, 고종의 신임을 받아 일본의 침략과 외교권 강탈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1905년에는 고종의 뜻을 미국에 전달하려는 외교 활동에 나섰다. 이때 을사늑약 체결 전후의 급박한 상황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미국의 관심과 지원을 구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앞두고는 특사 파견을 돕는 막후 활동을 벌였다. 고종이 파견한 이상설·이준·이위종과 함께 대한제국의 처지를 알리는 데 힘썼다. 그가 ‘제4의 특사’로 불리는 까닭이다.

헐버트는 영국 언론인 윌리엄 스테드 등에게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특사들의 호소가 해외 언론에 소개될 수 있도록 도왔다. 을사늑약이 고종의 동의 없이 강압적으로 체결됐다는 점을 알리며 일본의 국권 침탈을 비판했다.

특사들은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잃었다는 이유로 공식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론과 회의장 밖의 활동을 통해 일본의 침략을 고발하고 국권 회복의 뜻을 국제사회에 전했다.

일제의 감시와 압박을 받은 헐버트는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국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1909년에는 다시 한국을 방문했으며, 이후 미국에서 기고와 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광복 후인 1949년 7월 29일,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독립된 대한민국을 찾았다. 그러나 고령에 긴 여행의 피로가 겹쳐 병석에 누웠고, 일주일 뒤인 8월 5일 서울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별세했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바란 그의 뜻에 따라 유해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기억되는 헐버트 박사. 한글의 가치를 알아보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행동한 그를, 한글날 다시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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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석

'조국 근대화의 주역들' 저자, 傳奇叟(이야기꾼), '국민일보' 논설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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