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시집 한 권을 다시 펼쳤다. 안병호 장군의 <생명의 끈>이다. 2003년 말 출간됐으니 23년 만에 다시 읽는다. 그사이 저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회고록 <파란별담>도 냈다. 나는 시집을 펼치자 먼저 1993년 첫 만남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군 인사 문제를 취재해 <신동아>에 기고한 바 있다. 안병호 전 수도방위사령관에 관해서도 진급 인사와 관련해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기사가 나온 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받는 걸 봤느냐? 나는 그런 사람 아니다.”
우리는 신촌의 형제갈비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쓴 기사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려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첫 만남이 반가울 리 없었다. 나는 취재한 내용을, 그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을 놓고 이야기했다.
이후 그를 만나며 내가 처음 보도에서 보지 못했던 면을 알게 됐다. 나는 안병호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에는 물러서지 않는 군인으로 기억한다. 당시 그 다툼 때문에 만난 안병호를 30년 넘게 가깝게 지내고, 오늘 그의 시집을 다시 읽고 있다는 사실을 적어두고 싶다.
안병호는 194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 20기로 졸업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고, 제9사단장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수도방위사령관을 지냈다. 1993년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역했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난 해가 그의 군 생활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그는 생도 시절부터 글을 썼다. <육사신보>에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소고나 산문, 논문 성격의 글을 자주 기고했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군인이다. 현역 군인으로 복무하면서도 공부를 이어가 석사 학위를 받았고, 전역 후 예순이 지난 나이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를 쓴 것도 전역 뒤의 취미가 아니었다. 베트남전에 참전 중이던 1966년, 시 ‘전쟁의 소변(素辨)’을 <시문학>에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군복을 입고 전쟁터에 있던 청년이 전쟁을 시의 언어로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안병호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의 끈>의 책날개에는 이 시집이 만들어진 사정이 적혀 있다. 그는 현역 시절에도 틈틈이 시를 썼지만 잦은 부대 이동과 이사로 원고 상당수를 잃었다. 물에 잠겨 못 쓰게 된 원고도 있었다. 남은 글을 추스르고 근래에 쓴 시를 더해 한 권으로 묶었다.
그러니 이 책은 전역 후 조용한 곳에 앉아 쓴 시들만의 모음이 아니다. 군인으로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써두었다가 간신히 건져낸 말들도 들어 있다. 책으로 묶이지 못한 시가 더 많았을지 모른다. ‘생명의 끈’이라는 제목을 다시 보게 되는 까닭이다. 끊기거나 사라진 원고들 사이에서 남은 시들이 한 권으로 이어졌다.
전역 후 그는 고향 쪽으로 돌아갔다. 책날개에는 “어깨 위의 별을 가슴속에 묻었다”는 그의 말이 실려 있다. 하동 금오산 자락에 집을 짓고 글쓰기와 연구를 이어갔다. 땅을 일구고 야생화를 가꿨다. 별을 단 군인의 삶을 지나 꽃과 흙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군인 안병호와 시인 안병호를 따로 떼어놓을 수는 없다. 나는 그를 만나며 감성이 풍부하면서도 생각의 줄기를 단단히 붙드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정치에도 뜻을 두었으나 출마의 길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 읽고 쓰고 연구했다. 장군이라는 호칭으로 다 담기지 않는 삶이었다.
책에 실린 평들도 그 두 면을 짚는다. 국문학자 김열규는 안병호의 시를 읽으며 기도와 시가 맞닿는 지점을 보았다. 시인 강희근은 시 속에서 국토와 우주를 함께 조망하는 시선을 읽었다. 문학평론가 백운복은 참신하고 때로 당돌한 이미지에 주목했다. 세 사람이 본 것은 조금씩 다르지만, 군 경력만으로 그의 시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만난다.
책을 다시 펼친 지금, 나는 이 평들을 길잡이로 삼되 작품을 직접 더 읽으려 한다. <생명의 끈>을 장군이 썼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하게 대접하고 싶지는 않다. 그가 어떤 장면을 골라 시로 남겼는지, 전쟁과 귀향을 거친 사람의 언어가 어디에서 거칠고 어디에서 여려지는지 보고 싶다.
2023년 안병호는 회고록 <파란별담>을 냈다. 시집을 낸 지 약 20년 뒤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본 책이다. <생명의 끈>과 <파란별담>을 나란히 놓으면 한 사람이 자신을 기록하는 두 방식이 보인다. 회고록이 지나온 사건과 선택을 되짚는다면, 시집에는 그때그때 차마 설명으로 다 옮기지 못한 마음이 남아 있다. 이는 두 책을 함께 놓고 떠오른 내 생각이다.
1993년 신촌에서 그는 내 기사에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기자로서 그 말을 들었다. 세월이 흘러 그의 시집을 다시 펼친 오늘, 그 첫 만남을 고맙게 생각한다. 의견이 맞서면서 시작된 인연이었고, 그래서 그가 건네는 말과 그가 남긴 글을 더 오래 살피게 됐다.
<생명의 끈>은 내가 그 인연을 다시 붙드는 책이다. 군인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시를 썼는가를 묻는 데서 출발해, 나는 이제 그가 군인으로 살면서도 왜 시 쓰기를 놓지 않았는가를 생각한다. 23년 만에 다시 읽는 시집에는 그 질문이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