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 아닌 ‘민간선박’ 2000척이 바다에 장벽…중국 해상민병대의 ‘회색지대 전략’

군함도, 구축함도 아니었다. 겉으로는 고기잡이에 나서는 평범한 어선들이었다. 그런데 2000척 안팎의 중국 선박이 일제히 움직여 수백㎞에 이르는 거대한 ‘바다의 벽’을 만들었다.
최근 열린 한중일 안보 전문가 좌담에서 참석자들은 중국의 해양전략을 논의하면서 이 같은 대규모 민간선박 움직임에 주목했다. 중국 해군이나 해경뿐 아니라 이른바 ‘해상민병대’와 민간선박이 유사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2025년 12월 25일 동중국해에서는 약 2000척의 중국 어선이 두 개의 긴 대열을 형성했다. 각 대열은 약 290마일(약 470㎞)까지 이어졌다. 이어 2026년 1월 11일에도 약 1400척이 200마일 넘게 뻗은 대형을 만들었다. 일부 선박은 과거 해상민병대 활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좌담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단순한 어선들의 집결로만 볼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한 참석자는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대만해협, 동중국해, 서해와 동해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해역에서 군사력뿐 아니라 ‘회색지대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며 해상민병대의 움직임까지 한국과 일본이 함께 관찰하고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대만해협에서 위기가 발생할 경우 문제가 달라진다. 어선과 민간선박이 좁은 해역에 대규모로 집결하면 한국과 일본, 주일미군 등의 함정과 수송선 이동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좌담 참석자는 “이미 차단망을 설치해버린 상태에서는 행동의 자유가 제약된다”며 이런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할 정보공유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중국 해상민병대는 그래서 ‘회색지대’ 전력으로 불린다. 군함을 직접 내세우지 않고 민간선박의 외형을 유지한 채 영유권 주장이나 상대국 압박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아시아해양투명성이니셔티브(AMTI)는 2025년 남중국해에서 중국 해상민병대 활동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늘었다고 분석했다.
지난 4월에는 남중국해 스카버러 암초 입구에 중국 측 부유식 장벽이 설치되고 주변에 중국 해경과 해상민병대 선박들이 배치된 모습이 위성사진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다만 2025년 말과 올해 초 동중국해에서 집결한 2000척과 1400척의 어선 전체를 해상민병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일부 선박의 해상민병대 활동 전력은 확인됐지만 전체 선박의 성격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중국 측에서는 동절기 정상적인 어업활동이라는 반론도 제기됐다. 그럼에도 수천 척의 선박이 짧은 시간에 일정한 대형을 만들었다가 흩어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동아시아 해양안보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군함이 바다를 막으면 군사행동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하지만 어선 2000척이 바다를 막는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평시에는 어선이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거대한 ‘바다의 벽’이 될 수 있다. 중국의 회색지대 전략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