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오래된 친구와 걷는 길, 먼저 떠난 사람들을 만나다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니 오래된 친구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나보다 한 살 아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 세월을 헤아리기조차 쉽지 않다. 해양대학교를 졸업한 뒤 시드니에 정착한 친구는 내가 오면 꼭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Coogee Beach로 향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는 마음이 복잡할 때 이곳을 걷곤 해.”
“하이데커의 숲이군.”
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와 바다 사이 모래 위에 긴 머리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노트를 펼쳐놓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바다를 향한 뒷모습뿐이었다. 그녀 앞에는 갈매기들이 모여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해변으로 내려가 한동안 앉아 있었다. 우리와 바다 사이 모래 위에 긴 머리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노트를 펼쳐놓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바다를 향한 뒷모습뿐이었다. 그녀 앞에는 갈매기들이 모여 있었다. 얼마 뒤 갈매기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라 바다 쪽으로 낮게 날더니 물 위에 내려앉았다. 하얀 몸들이 파도 위에 흩어졌다.

한참 뒤 여자가 일어섰다. 긴 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우리 곁을 지나갈 때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핀과 안경만 비스듬히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렇게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우리는 학창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그 시절 남들은 공부만 했지만 우리는 공부하면서 책을 많이 읽었다. 단편도, 장편도 읽었다. 친구는 특히 헤르만 헤세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친구는 소설을 썼고 교내 문학상을 받았다. 제목은 「종소리」였다. 남자주인공은 나였다. 여자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여학생은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친구는 그 여학생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친구가 마음을 두었던 사람은 그 여학생의 친구였다. 훗날 그는 그 친구와 결혼했고, 지금은 함께 시드니에서 살고 있다.

그때의 우리는 그것이 이렇게 오래된 이야기가 될 줄 몰랐다.

소설 속 남자주인공이었던 나는 이제 그 소설을 쓴 친구와 시드니의 해변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 우리와 바다 사이에 앉아 있던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 사람은 군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인명구조원(lifesaver)이었다. ‘Fallen Lifesavers Memorial’이었다.

우리는 다시 걸었다. 해변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다 뜻밖의 기념물 앞에 섰다. 두 남자가 청동으로 서 있었다. 서로 손을 잡고 있었다. 한 사람은 군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인명구조원(lifesaver)이었다. ‘Fallen Lifesavers Memorial’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을 오래 바라봤다.

삶은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닮았다.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는 것. 인명구조원은 물에 빠진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졌을 것이고, 군인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떠났을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손을 잡고 서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조금 전 해변에 앉아 있던 우리를 떠올렸다. 소설을 읽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앞날을 상상하던 두 소년. 그때 우리는 이렇게 오래 살아 다시 만날 것이라고도, 언젠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바닷가를 걷게 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 더 올라가자 또 하나의 기념물이 나타났다. 발리 폭탄테러 희생자들을 기리는 memorial이었다. 이번에는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행을 떠났다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평범한 하루를 살다가 갑자기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두 기념물 사이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쪽에는 사람을 살리려다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삶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이를 걷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으로.

그 순간 기념물이란 무엇인가 생각했다. 죽은 사람을 과거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들 앞에 서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시간을 돌아본다. 한때 우리가 소년이었음을 생각하고, 함께했던 사람 가운데 이미 떠난 이들을 생각하고, 지금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그날 Coogee의 길이 그랬다. 우리는 옛 친구끼리 학창시절 이야기를 나누러 갔다. 그러나 그 길은 우리 자신의 과거를 지나, 우리보다 먼저 떠난 사람들의 시간으로 데려갔다. 우리의 젊음에서 그들의 죽음으로, 그리고 다시 오늘의 우리에게로. 바다는 그 모든 시간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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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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