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문섭 칼럼] 상승 욕구와 인정 욕구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출 11:5)
왕과 몸종 그리고 가축. 이 셋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같을 리가 없습니다. 이들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합니다. 이 구절은 고대 이집트의 사회 구조를 한 마디로 함축하는 표현이자 동시에 오늘날 이 세상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왕좌는 지키고 싶은 자리입니다. 반면 맷돌 뒤는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맷돌 뒤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그 발버둥은 맷돌을 제자리에서 더 빨리 돌아가게 만들 뿐입니다. 왕좌에 앉은 이들은 사람들의 그 처절한 노력을 이용하여 거대한 제국의 맷돌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언제나 맷돌 주위를 벗어나 왕좌를 향해 달립니다. 그것을 쟁취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설령 내가 앉지 못할 왕좌라도 그 근처에 갈 수만 있다면 적어도 지금의 맷돌 뒤보다는 나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욕구에 시달립니다. 왕좌에 오르려는 상승 욕구, 그리고 왕좌에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인정 욕구입니다. 또한 두 가지 불안에 시달립니다. 왕좌에 앉은 이는 자리를 빼앗길까 불안하고, 맷돌 뒤에 앉은 이는 평생 이 자리일까 불안합니다.
그곳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결핍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때 그 결핍을 채우려는 보조 수단으로서 존재하는 게 가축, 곧 자산과 소유입니다.
왕위, 맷돌 그리고 짐승. 세상 전체가 이 한 줄에 담겨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세계에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죽음’을 선포하십니다. 장자는 곧 미래입니다. 파라오에게 맏아들은 파라오의 미래, 몸종의 맏아들은 몸종의 미래입니다.
유월절의 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미래가 동기화되었습니다. 다 다를 줄 알았는데 실상은 다 똑같았습니다. 왕의 미래와 맷돌 돌리는 이의 미래가 같아졌고 심지어 가축의 운명조차 다르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만든 계층의 두께가 아무리 두꺼워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종잇장보다 얇았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보증수표로 들고 있었던 ‘장자’에게 사망이 선고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 미래가 죽음을 맞이한 그날 밤, 유월절은 전혀 다른 미래를 소개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미래는 왕좌냐 맷돌이냐 하는 나의 위치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월절이 여는 새로운 미래는 다릅니다. 이 미래는 나의 위치와 소유가 제공하는 보장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보증하는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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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묵상 두 번째 이야기
<서툰 인생, 잠깐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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