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할수록 못 푸는’ 골목상권 방정식

“대형마트로 몰리면 동네경제 전멸”…언론은 재래시장 간 대선주자 꽁무니만

지난 21일 오후 구글코리아 등 외국계기업들이 많이 입주해 있는 서울 역삼동 파이낸스빌딩 앞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이 건물에 입주한 영국계 양주회사 디아지오에 항의하는 유흥주점 업주들의 집회가 곧 열렸다.

디아지오가 지난 5월 윈저 가격 인상계획을 발표했다가 룸살롱 등 유흥주점들이 항의하자 철회한 뒤 3개월여 만인 지난 1일 위스키 가격을 5.5%를 전격 인상했기 때문이다.


이날 집회에서 오호석 골목상권살리기소비자연맹 상임대표는 삭발식을 했다. 한국유흥음식업중앙회장도 맡고 있는 오 대표는 지난 13일 서울 논현동 강남YMCA 3층 연회장에서 열린 서울지역 유흥주점 업주 교육에서 21일 삭발을 예고했다. 그는 “가격인상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기습 인상한 윈저가 망할 때까지 삭발투쟁, 나아가 단식투쟁도 불사할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했다.

그런데 13일 교육에서는 술집 경기가 어려운 가운데 양주 값을 올린 디아지오에 대한 성토는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그날 약 1시간동안 강연하면서 오 대표가 가장 많이 강조한 부분은 ‘골목상권’이었다.

“주머니가 비어가고 자영업자 모두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술장사만 어려운 게 아닙니다. 골목상권 매출의 50%를 못된 유통재벌 손아귀에 빼앗겼습니다. 밥집도 술집도, 미장원도 모두 돈이 돌지 않고 있어요.”

오 대표의 말대로 대형유통재벌들이 운영하는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의 매출은 범위가 크든 작든 지역경제를 선순환 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대형마트의 매출은 모두 본사로 귀속돼 주주들과 방송, 광고, 연예 엔터테인먼트 등 일부 공급사슬(suppy chain)만 살찌울 뿐이다. 지역 자영업자들의 매출 대부분을 뺏어 이룬 경제성과 중에서 기초생활을 충족시키는 정도의 마트 종사자 임금이 빠져 나가는 것 이외에 지역에서 풀리는 돈은 거의 없다.

오호석 대표가 삭발을 하던 날 같은 시각 서울 강북의 종로 북촌로 헌법재판소 대강당에서는 한국공법학회(회장 정재황, 성균관대)가 ‘국가, 경제 그리고 공법- 경제와 복지에 대한 국가역할의 공법적 과제’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고 있었다. 연말 치러질 한국의 대통령선거의 화두인 ‘경제민주화’를 공법(公法)질서 차원에서 논의하는 자리였다.

학술대회에서 파리 데카르트 대학 브노아 들로네(Benoit Delaunay) 교수는 ‘경제, 복지에 대한 국가역할과 공법질서에 관한 프랑스의 경험’을 발표하면서 “프랑스에선 지난 1973년부터 소형 상점(골목상권) 보존을 위해 대형마트 영업과 신규개점을 법으로 제한해왔다”고 설명했다.

주민 4만 명 미만 지역에서는 면적 1000m²를 초과하는 상점을, 주민 4만 명 이상 지역에서 1500m²를 초과하는 상점을 각각 신규설치(또는 확장)할 때 건축허가와 별도로 전문위원회의 사전허가를 받도록 하는 ‘상업 및 장인에 관한 지도법(일명 Royer법)’이 그것이다. 또 프랑스 대형마트는 3가지 예외를 인정하되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 식으로 종업원들의 휴일을 보장하고, 대신 동네 상점들이 주로 일요일에 집중해 영업을 한다.


삭발을 마친 오호석 대표는 “동네 집 앞의 야채장사, 밥집, 쌀가게, 문방구에 돈이 돌아야 저녁에 술도 한잔씩 하고, 그래야 술장사들도 먹고 사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집회에 참석한 한 자영업자는 “각 당의 대선후보들이 모두 ‘골목상권’을 말해왔지만, 오호석 대표만큼 쉽게 골목상권 살리기와 경제난 해소 방법을 설명한 사람을 못봤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이 자영업자는 “저 같은 못 배운 사람도 요즘 경제 문제가 뻔히 보이는데 경제·법률 전문가, 정치인, 언론인들은 그게 쉽지 않은가 봐요”라고 덧붙였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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