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파발 서오릉 숙종의 ‘명릉’에 얽힌 사연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대선을 앞두고서 막말이 판을 치고 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품격을 지키면서 싸우면 참으로 좋으련만…이들의 막말을 여과 없이 그대로 전하는 언론도 문제다.
말도 안 되는 무의미한 주장을 가리켜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한다. 잡식성인 개가 초식성인 소처럼 풀을 뜯어먹지는 않는다. 개가 풀을 뜯는다는 말의 옳은 표현은 ‘개풀 뜯는 소리’일 듯하다. 그렇다면 개풀은 개(犬)와는 무관한 ‘갯가에 난 풀’로, 하찮은 것을 가리킨다.
정치판을 보노라면 ‘개 코도 모르면서 개풀 뜯는 소리 하는 것’ 같다. ‘개 코도 모르면서’라는 말의 어원은 이렇다. 조선조 숙종이 어느 날 미행 중 수원성 고개 아래 쪽 냇가를 지나는데 허름한 시골총각이 관을 옆에 놓고 슬피 울었다. 숙종은 그가 물이 나오는 냇가에다 묘자리를 파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임금은 더벅머리 총각에게로 다가가 “여보게 총각, 여기 관은 누구의 것이요?”하고 물었다. “제 어머님 시신입니다.” “그런데 개울은 왜 파는고?”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합니다.” “이보게 이렇게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어찌 여기다 어머니 묘를 쓰려고 하는가?” “저도 영문을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갈 처사’라는 노인이 찾아와 절더러 불쌍타 하면서 저를 이리로 데리고 와 이 자리에 묘를 꼭 쓰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 분은 유명한 지관인데, 저기 저 언덕 오막살이에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숙종이 가만히 듣자 하니, ‘갈 처사’라는 지관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지니고 다니던 지필묵을 꺼내어 몇 자 적었다. “여기 일은 내가 보고 있을 터이니 이 서찰을 수원부로 가져가게. 수문장들이 성문을 가로막거든 이 서찰을 보여주게.” 총각은 또 한번 황당했다.
하지만 총각은 급한 발걸음으로 수원부로 갔다. 서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명! 수원부사는 이 사람에게 당장 쌀 삼백 가마를 하사하고, 좋은 터를 정해서 묘를 쓸 수 있도록 급히 조치하라.” 수원부가 발칵 뒤집혔다. 허름한 시골 총각에게 유명한 지관이 동행하질 않나, 창고의 쌀이 쏟아져 바리바리 실리지를 않나! “아! 상감마마, 그 분이 상감마마였다니!”
한편 숙종은 총각이 수원부로 떠난 뒤 괘심한 ‘갈 처사’라는 자를 단단히 혼내 주려고 총각이 가르쳐 준대로 가파른 산마루를 향해 올라갔다. 단단히 벼르고 올라간 산마루에 있는 찌그러져가는 ‘갈 처사’의 단칸 초막은 그야말로 볼품이 없었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한참 뒤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게 뉘시오?” 방문을 열며 시큰둥하게 손님을 맞는 주인은 영락없는 꼬질꼬질한 촌노인네 행색이었다. 숙종은 그대로 문밖에서 물었다. “나는 한양 사는 선비인데 그대가 ‘갈 처사’ 맞소?” “그렇소만, 무슨 연유로 예까지 나를 찾소?” “오늘 아침 저 아래 상을 당한 총각더러 냇가에 묘를 쓰라 했소?” “그렇소.” “듣자니 당신이 묘 자리를 좀 본다는데, 물이 펑펑 솟아나는 냇가에 묘를 쓰라니 가당키나 한 일이요?”
숙종은 참았던 감정이 어느새 격해져 목소리가 커졌다. 갈 씨 또한 촌 노인이지만 낮선 손님이 찾아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선비란 양반이 개 코도 모르면서 참견이야. 당신이 그 땅이 얼마나 좋은 명당 터인 줄 알기나 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숙종은 기가 막혔다.
“저기가 어떻게 명당이란 말이요?”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이 양반아! 저기는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쌀 3백가마를 받고 명당으로 들어가는 땅이야.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발복을 하는 자리인데, 물이 있으면 어떻고 불이 있으면 어때? 개 코도 모르면 잠자코 나 있으시오.” 숙종의 얼굴은 그만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갈 처사 말대로 시체가 들어가기도 전에 총각은 쌀 3백가마를 받았으며, 명당으로 옮겨 장사를 지낼 상황이 아닌가! “영감님이 그렇게 잘 알면 저 아래 고래등 같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지 않고, 왜 이런 산마루 오두막에서 산단 말이오?” “그래도 여기는 바로 임금이 찾아올 자리여. 지금은 비록 초라하지만 나라님이 찾아올 명당이란 말일세.” “그렇다면 왕이 언제 찾아옵니까?” “거, 꽤나 귀찮게 물어 오시네. 잠시 기다려 보오. 내가 재작년에 이 집을 지을 때에 날 받아 놓은 것이 있는데, 가만…. 어디에 있더라?” 하고 방 귀퉁이에 있는 보자기를 풀어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먼지를 털면서 들여다보더니, 그만 대경실색을 했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종이에 적힌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시간이었다.
“‘갈 처사’, 괜찮소이다. 대신 그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묻힐 자리 하나 잡아주지 않겠소?” “대왕님의 덕이 높으신데 제가 신하로서 자리 잡아 드리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어느 분의 하명이신데 거역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갈 처사’가 잡아준 숙종의 왕릉이 지금 서울의 서북쪽 서오릉에 자리한 ‘명릉’(明陵)이다.
그 후 숙종은 ‘갈 처사’에게 3천냥을 하사하였으나, 노자로 30냥만 받아들고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이야기가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개 코도 모르면 잠자코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