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바라크 별세···‘현대판 파라오’ ‘전쟁영웅’에서 ‘30년 독재’로 ‘아랍의 봄’에 축출

무바라크 대통령

[아시아엔=편집국] 2011년 ‘아랍의 봄’ 때 축출된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전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91세로 사망했다고 이집트 국영TV 등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이집트 국영TV는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수도 카이로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숨졌다”고 전했다.

최근 무바라크의 장남인 알라는 무바라크가 올해 1월 수술을 받은 뒤 집중치료를 받고 있다고 전했었다. 어떤 수술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집트 정부는 무바라크의 사망과 관련해 이날부터 사흘간 전국적인 애도일을 선포했다.

무바라크는 ‘현대판 파라오’로 불릴 정도로 철권을 휘두른 독재자로 평가받는다. 1981년 국민투표를 거쳐 대통령에 당선된 뒤 30년 동안 장기집권하다가 2011년 민주화 시위로 물러났다.

무바라크는 1928년 이집트 북부 나일 델타지역에서 태어나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전투기 조종사로 하늘을 날았다.

1969년 공군 참모총장에 올라 이스라엘과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참패한 이집트 공군을 재건했고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초기단계에서 이스라엘군을 몰아붙여 전쟁영웅으로 떠올랐다.

무바라크는 전쟁에서 얻은 명성에 힘입어 1975년 안와르 사다트 정부의 부통령으로 임명됐고 1979년 집권 국민민주당(NDP)의 부의장에 선출되면서 사다트의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

아랍권 국가 중 최초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한 사다트가 1981년 10월 이슬람주의자에게 암살되자 당시 부통령이었던 무바라크는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무바라크는 사다트 암살 이후 불안정한 정국을 비상계엄법으로 통제했고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했다.

다른 한편으로 무바라크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이유로 아랍연맹에서 퇴출된 이집트를 1989년 다시 가입시키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을 중재하는 등 중동평화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는 미국과 친밀한 외교정책을 펴면서 군사·경제적으로 지원을 받는 친(親)서방 노선을 유지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1991년 발발한 미국 주도의 걸프전쟁에 이집트군을 파병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바라크의 인기는 장기집권과 부패에 대한 국민의 염증, 빈부격차 심화 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으로 약화했다. 특히 자신의 차남 가말 무바라크를 후계자로 내세우면서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

그러다 201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 당시 국민의 거센 퇴진 시위에 직면했고 결국 그해 2월 11일 대통령직에서 사퇴했다.

2011년 4월 체포된 무바라크는 2012년 재판에서 시위 참가자 850여 명이 사망한 것과 관련해 종신형 판결을 받았지만 나중에 무죄가 선고됐고 2017년 3월 석방됐다.

이후 대중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무바라크는 작년 10월 유튜브에 등장해 제4차 중동전쟁을 회상하는 장면을 보여줘 눈길을 끌었다.

1980년대 북한을 찾은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과 북한의 김일성 주석(오른쪽).

한편 무바라크는 집권 당시 북한에 우호적인 지도자로도 유명하다. 북한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에 전투기와 조종사를 지원했고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무바라크는 이를 계기로 북한과 각별한 관계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바라크는 북한 김일성 주석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1980년부터 1990년까지 네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다.

무바라크가 2011년 민중봉기로 쫓겨났지만 이집트의 민주화는 아직 요원한 것이 현실이다. 이슬람 운동단체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무함마드 무르시가 2012년 대선에서 첫 민선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이듬해인 2013년 7월 압델 파타 엘시시 현 대통령의 군부 쿠데타로 실각했다.

무바라크와 마찬가지로 군인 출신인 엘시시 대통령은 무슬림형제단 등 야권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펴왔다.

무바라크가 시위대 유혈진압과 관련해 제대로 단죄받지 않고 엘시시 정권에서 석방된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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