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출신 최용덕 장군 50주기 “선배님 자랑스럽고 송구합니다”
[아시아엔=강성구 공군 공보정훈실장, 공군 대령]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공사교수로 있는 후배의 카톡을 받았다. 서거 50주기를 맞은 최용덕 장군 묘소를 몇몇 후배들이 참배한 모양이다.
공군의 아버지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은 최용덕 장군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공군 창군의 머릿돌이 된 인물이다. 그런 분의 50주기를 공군차원에서 기리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쉽다.
광복군 출신의 최용덕 장군과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공군참모총장은 이 두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군에서 복무하고 비행을 배웠던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독립운동 계열의 이 두 선배는 공군 내에서조차 제대로 평가받거나 기억되지 못했다.
우연히 50년전 최 장군의 쓸쓸한 죽음을 애도한 경향신문의 칼럼을 보게 되어 공유해본다.
경향신문 [여적(餘滴)]
– 1969. 8. 18.
“그 사람의 참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은 그 사람의 유서거나 유언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최후의 발언은 그렇게도 솔직하고 진실한 것일까. 절세의 영웅 ‘나폴레옹’의 유서는 거의가 재산처리에 관한 것이었다. 영웅의 실리적인 진상을 보여준 것이 될까. 옆집에서 꾸어온 닭 한 마리를 꼭 갚아 달라고 부탁한 것은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유언이다. 그의 철학만큼이나 위대했던 ‘소크라테스’의 인간적 성실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 될까.
“내가 죽으면 군복을 입혀 묻어 달라.” 이 말은 지난 15일 별세한 최용덕 장군의 유언이다. 얼마나 슬기로운 군인다운 유언인가. 우리 손으로 만든 비행기를 타보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임종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장군은 또한 되풀이 한탄했다고 한다. 이 또한 얼마나 공군다운 한탄인가. 평소에 염원했던 장군의 모든 것이 이렇게 죽음을 앞에 놓고 토로된 것일까.
조국이 일제의 침략을 당하자 중국으로 망명, 그곳에서 중국 군관학교를 졸업, 중국공군 기지사령관을 대령으로 역임했고, 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국방차관을 거쳐 공군참모총장의 중책을 맡았었고, 예편 후에는 또 체신부장관과 주중대사의 요직을 역임했던 장군의 일생은 그대로가 조국의 광복과 재건에 자신의 전부를 바친 한 생애였다. 15일의 복절(復節)에 운명한 것도 최장군의 경우엔 조금도 우연한 것이 아닌 성 싶다.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도 최장군보다 더 고위에 있었던 군인도 많았고 최장군보다 더 많은 요직을 역임했던 인사들도 많았다. 그러나 최장군 만큼 청빈한 생활 속에서도 끊임없이 조국의 비원(悲願)을 마지막 순간까지 갈구해 온 애국자는 별로 보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현직을 역임했던 분이 야인이 되었을 때 집 한 간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그의 마지막 유언의 애절한 호소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국자면 다 애국자며, 군인이면 다 군일일까. 군복을 입고도 군인 아닌 사람이 있듯, 군복을 벗어도 군인일 수밖에는 없는 사람이 있다. 최용덕 장군이 바로 그런 분이다. 망명 시에도 공군이었고, 광복 후에도 공군이었으며, 예편 후에도 현역 이상의 장군이었던 분이 바로 최용덕 장군이다.
살아서 대한민국의 공군이었던 최장군은 저승에서도 대한민국의 공군일 것이다. 군복이 그대로 자신의 육신이었던 장군은 이제 혼백의 장군으로서 생시(生時)와 마찬가지로 우리 조국을 지켜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