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0일] 레이건 미대통령 총 맞아
2008년 ‘킬링 필드’ 알린 사진기자 사망
2008년 3월30일 캄보디아 내전을 다룬 영화 <킬링필드>의 실제 주인공 디트 프란이 숨졌다. 영어 통역관이던 디트는 1973년 캄보디아 내전을 취재하러 온 쉔버그를 만나 크메르루주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캄보디아를 탈출하던 길에 보았던, 학살 희생자들의 계곡을 묘사하는 ‘킬링필드’란 말은 디트가 직접 만든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서처럼 디트와 통역-기자 관계로 만나 고락을 함께했던 시드니 쉔버그 기자는 디트가 췌장암으로 3개월째 투병하다 이날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쉔버그는 “프란은 진정한 기자였고 진실을 찾기 위해 싸운 투사였다”고 회고했다.
캄보디아 인구의 3분의 1 가량인 200만명을 학살시킨 크메르루주가 프놈펜을 점령할 당시 디트의 가족을 탈출시킨 사람이 쉔버그였다. 당시 탈출에 실패했던 디트는 안경이나 손목시계만 차도 ‘서구의 앞잡이’로 몰아 학살하던 정권 치하에서 택시기사로 신분을 숨겨 간신히 살아남았다. 쌀 한줌으로 하루를 나고, 쥐까지 잡아먹으며 4년 반의 고된 생활을 버틴 디트는 79년 베트남의 침공을 틈타 캄보디아를 탈출할 수 있었다. 65㎞를 걸어 타이 국경의 난민촌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기다리던 쉔버그와 다시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 정착한 뒤 디트는 <뉴욕타임스>의 사진기자로 일하는 한편,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고국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쉔버그는 자신과 디트가 겪은 이야기를 <디트 프란의 생과 사>라는 책으로 펴내 80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들의 얘기는 아카데미상 3관왕의 영예를 안은 1984년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킬링필드>로 만들어졌다.
1981년 레이건 미국 대통령 피격
1981년 3월30일 오후2시25분 미국 워싱턴의 힐튼호텔 앞에서 25세의 부랑아 존 W. 힝클리가 갓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을 저격했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이곳에서 열린 미국노동총동맹산별회의(AFL-CIO)에 참석해 연설을 마치고 나와 대통령 전용차에 오르고 있었다. 힝클리는 모두 6발의 총알을 발사해 왼쪽 겨드랑이 부분을 피격당한 레이건을 포함해 모두 4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천만다행으로 탄환이 심장에서 12cm 떨어진 왼쪽 폐에 박혀 성공리에 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
콜로라도 주 에버그린 출신인 힝클리는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를 너무 좋아해 그녀가 출연한 스코시즈 감독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의 한 장면을 흉내내 레이건을 저격한 것으로 밝혀졌다. 힝클리는 범행을 저지르기에 앞서 포스터에게 최후의 편지 한 통을 썼다. ‘부디 마음을 돌려 달라. 내가 이 역사적 행위를 통해 당신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재판부는 힝클리의 암살 미수를 정신병에 의한 것으로 결론내리고 그를 의료기관에 보호시켰다.
레이건 대통령은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부인 낸시 여사에게 “여보. 내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잊었구려”라고 말했고, 수술실에 들어온 의사들을 향해선 “당신들이 공화당원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으며 “총에 맞고도 죽지 않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1965년 사이공 미대사관 폭파
1965년 3월30일 사이공의 미대사관에서 굉음을 울리는 폭발물이 터졌다. 베트콩 해방전선이 주도한 테러형식의 반미투쟁이었다. 그해 키 정권 등장 전후로 사이공 등 여러 대도시에서 해방전선 측의 테러 공세가 갑자기 강화됐다. 1964년 12월24일, 사이공 미군장교숙소 폭파(사상자 76명)에 이어 1965년 2월10일 퀴논 미군숙소 폭파(사상자 40명)로, 1달20일 뒤인 1965년 3월30일 사이공 미대사관 폭파(사상자 208명)로 이어졌다. 이 일련의 사이공 테러는 국제여론과 미국여론에 조준한 것으로 그 노린바 대로 미국 국내의 反戰 기운에 불을 붙였다.
1856년 크림전쟁 종결
1856년 3월30일 파리에서 프랑스·영국·사르데냐피에몬테·투르크 연합군과 러시아가 크림 전쟁을 종결짓는 파리 조약에 조인했다. 서유럽 열강들은 러시아로부터 오스만투르크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크림 전쟁에 참가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투르크의 문제에 관해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이 조약에 서명한 국가들은 투르크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도나우 강 어귀의 베사라비아를 몰다비아에 양보했으며, 몰다비아는 왈라키아와 마찬가지로 투르크에 종속된 자치국으로 인정받았다.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나중에 루마니아로 통합되었다. 흑해는 각국의 함대와 가까워 중립 영해가 되었으며, 도나우 강은 모든 국가의 선박에 개방됐다.
파리 조약은 1856년 크림 전쟁의 후속 조처물로 이뤄진 조약으로서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사르데냐 왕국, 프랑스, 영국이 체결한 조약이다. 1856년 3월 30일에 체결되었으며 조약을 통해 흑해 일대의 영역이 중립지역으로 선포되었고 모든 군 관련 함선의 항해가 중지되었다. 군무장이 불가하게 되면서 인근의 투르크 영토가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상당 부분 얻게 됨과 동시에 러시아는 크림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잃게 된다.
이상현 기자?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