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8일] 1차 세계석유파동 끝난 날

2009 예멘서 한국 테러대응팀 대상 폭탄테러

2009년 3월18일 오전 8시40분(현지시각, 한국시각 오후 2시40분) 예멘 수도 사나에서 한국인 상대 폭탄 테러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현지에 파견된 한국 외교부의 대응팀과 유가족이 탄 차량이 폭탄 테러로 추정되는 공격을 받았다.

사흘 전인 3월15일 예멘 세이윤 지역에서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보이는 폭탄 테러로 고대 도시 시밤을 관광하던 한국인 관광객 4명이 사망했다. 이에 한국 외교부에서는 현지 대응팀과 유가족을 사고 현장으로 급파한 것이다.

한국의 정부대응팀 4명 중 2명과 유가족 3명을 포함한 8명이 현지 경찰차를 앞세우고 차량 2대에 나눠 타고 사나 샤흐란 호텔을 출발, 공항으로 가던 중 경찰차와 대응팀이 탄 차량 사이에서 폭탄이 터졌다. 차량 유리창이 부서지고 범퍼가 심하게 찌그러졌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다.

예멘 대사관에 따르면, 차량 사이로 사람이 하나 뛰어들었다. 옷 속에 폭탄을 숨기고 있어서 그런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도구가 없었고 행인인지 테러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피해자 측에서 나온 것이 아닌 혈흔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자살 폭탄 테러로 추정됐다. 예멘 내무부는 “테러범은 폭탄이 터지면서 현장에서 사망했다”면서 “한국 정부 대응팀과 유가족이 탄 차량이 자살 폭탄 테러 공격의 목표물이었다”고 18일 공식성명을 통해 확인했다.

당시 사상자는 없었지만 사흘전인 3월15일 한국인 관광객 4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가 ‘외국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가 아닌 한국인을 표적으로 한 것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이런 관측은 △ 한국 외교부가 17일 테러 관련 성명을 발표했고 △ 정부 대책팀의 동선이 언론에 공개됐다는 점 등이 한국인을 겨냥하게 한 결정적 계기라는 분석에 힘이 실렸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는 미군과 나토 국제안보지원군(ISAF)을 지원하려 하는데 대한 알카에다의 경고라고 보기도 했다. 반면 경호용 오토바이를 앞세운 고위 관료에 대한 무작위 테러라는 해석도 있었다.

2000년 대만 천수이볜 총통 당선

민진당의 천수이볜(당시 49세) 후보가 2000년 3월18일 중국의 위협 속에 실시된 총통 선거에서 39.30%의 지지로 승리,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해 1949년 대만으로 건너간 국민당 통치를 종결시켰다.

무소속 쑹츄유 후보와 국민당 롄잔 후보를 제치고 39%의 득표율을 기록, 첫 번째 비(非) 국민당 계열 총통에 선출됐다. 그러나 천수이볜은 처음 몇 주 동안은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국정 운영에서 나타난 부패와 국민당의 반대에 부딪혀 추진한 법안의 국회통과 실패로 지지도가 급격히 하락했다.

천수이볜은 1951년 남부 타이난현에서 출생, 초등학교 시절부터 전교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중학교 수석 졸업, 대만대 법과 수석 입학, 대학재학중 사법시험 수석합격 등 입지전적인 모델이 됐다.

1994년 타이베이시 첫 직선시장이 됐으나 1998년 연임에 실패했다. 대만독립주의자인 천수이볜이 시장 재임시 추진한 강력한 개혁을 기억했던 많은 사람들은 이번 선거에서도 그를 지지했고 공직사회를 정화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부인 우수전은 정치테러로 15년째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2004년 재선에 도전해 선거 운동을 하던 중 3월19일에 총격을 받았다. 이 선거에서 결국 그는 645만 표를 얻어 642만 표를 얻은 중국국민당(국민당)의 롄잔 후보를 누르고 총통에 다시 당선됐다.

임기가 끝난 뒤 2008년 11월11일에 비밀자금 횡령 및 불법자금 세탁 등 혐의로 구속됐다. 2009년 9월11일 1심에서 종신형과 2억 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았고, 3심에서는 징역 19년형을 선고받았다. 구금기간 중 쓴 글을 묶어서 <1.86평>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천수이볜은 징역형을 선고 받은 첫 번째 중화민국 총통이다.

1974년 아랍 산유국기구 석유금수조치 해제

1974년 3월18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유가 동결과 석유수출 금지 해제’를 발표했다. 1973년 10월 이후 5개월을 끌어온 1차 석유파동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석유파동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1973년 10월6일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나라에 석유수출을 금지하면서 세계적인 석유전쟁으로 비화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주축으로 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1973년 10월17일 유대교 명절인 욤 키푸르를 기해 석유금수조치를 발표했다. 회원국의 산유량을 23% 줄이고 미국 등 이스라엘 지원 국가에는 원유를 공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석유금수조치 해제로 석유위기는 5개월 만에 끝났다. 그러나 1차 석유파동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1973년 초 배럴당 2.59달러였던 중동산 원유 값은 1년 만에 11.65달러로 무려 4배나 폭등했다. 석유 소비국들은 인플레이션 심화와 국제수지 악화, 불황과 실업 증가라는 4중고를 겪었다. 세계경제 전체의 경제성장률도 곤두박질쳤다.

1차 석유파동의 최대 수혜자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였다. 수요자 주도이던 국제석유시장이 공급자 지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4년 뒤 2차 석유파동을 거치면서 국제석유가격의 이런 공급자 지배 현상은 지속됐다. 2008년에는 서부텍사스 산(産) 중질유(WTI)와 한국이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가 각각 사상 최고치인 배럴당 145달러와 140달러에 이르렀다. 이후 이런 최고점에 도달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중동 정세 때문에 언제든 최고치를 경신할 준비가 돼 있다.

1970년 캄보디아 친미 무혈쿠데타로 시아누크 실각

1970년 3월18일 캄보디아 의회는 소련을 방문 중이던 국가원수 시아누크를 해임했다. 우익의 친미파인 수상 론 놀이 실권을 장악했다.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는 당시까지 중립정책을 취해왔다. 그런데 시아누크가 베트남 해방세력의 캄보디아 주둔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 우파를 자극해 쿠데타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주동자이던 론 놀 장군은 비상시 권력이 주어져 수상에 올랐고, 같은 해 10월 크메르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론 놀의 수상 취임식 때, 미군은 하늘에 시아누크를 비판하는 삐라를 뿌려 론 놀을 지원했다.

구테타 이튿날인 3월19일 시아누크는 예정대로 모스크바에서 북경에 도착했다. 중국정부는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시아누크는 3월23일 당시까지 적대관계였던 공산세력 크메르 루즈와 함께 캄푸치아민족통일전선을 결성했다. 5월5일에는 캄보디아국왕민족연합정부를 수립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캄보디아에서도 시아누크를 지지하는 데모와 폭동이 나라의 도처에서 발생했다. 3월29일에는 약 4만명의 농민이 시아누크의 복권을 요구하는 데모 행진을 실시했다. 캄보디아 군대는 시위대를 무력 진압했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론 놀은 4월 미군에 자국에의 침공을 허가, 농촌 지역 곳곳에 미군의 공습이 자행됐다. 베트남 전쟁의 호치민 루트를 분쇄 목적이었지만, 수십 만 명의 캄보디아 농민이 희생이 됐고, 공산주의 세력 크메르 루주가 급격히 성장하는 반사이득을 누렸다. 론 놀은 격렬한 반베트남 캠페인을 벌여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을 지원한 의혹이 있었던 캄보디아 거주 베트남계 주민을 학살했다. 이로써 시아누크 집권 당시 50만 명이던 재캄보디아 베트남인 중 20만명이 1970년 한 해 동안에 베트남에 집단 귀환했다.

캄보디아 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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