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땀으로 번 돈 정승처럼 쓰고 간 요정 ‘청운각’ 설립자

조차임 청운각 설립자<사진 ‘정연재의 워킹서울’>

故 조차임씨 ‘우산장학금’ 전영애·정인섭·박찬욱·김빛내리 등 서울대교수 44명 배출

[아시아엔=나종태 <서울대총동창신문> 기자] 인권변호사로 이름이 높은 고 조영래 변호사,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 동양인 최초 독일 괴테 금메달 수상자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권오곤(법학72-76 본회 부회장) 한국법학원장, 박찬욱 서울대 총장직무대리, 김상헌 네이버 경영고문, 김빛내리 서울대 교수···.

나이·성별·직업·전공 모두 다르지만 이들에겐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했다는 것, 그리고 우산(又山)육영회 장학생이었다는 것.

지난 50년 동안 500여명의 서울대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온 우산육영회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1969년 서울대 대학원 인문사회계열 장학생 10명을 선발하면서 시작된 우산육영회는 1980년부턴 자연과학계열 대학원생들에게도 장학금을 수여했다. 산업화에 필요한 이공계 인재들에게 국가적 지원이 집중됐던 창립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우산육영회는 인문사회계열 분야의 우수한 인재들이 계속 학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균형추 역할을 했다.

순수학문 분야를 집중 지원해 장학생 중 44명이 서울대 교수가 됐다. 이들을 포함해 배출한 대학교수·전문연구원·법조인 등이 300명에 육박한다. 제대로 된 장학제도가 정착되지 않았던 1960년대 말, 매월 생활비를 지급하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운영됐으며 다른 어느 장학금보다 많은 액수를 지급했다.

수혜를 받은 장학생들이 뭉쳐 ‘우산동문회’를 결성, 장학기금을 모아 재단에 전달하는 선순환 또한 활발하다. 1988년 설립 2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열어 장학기금을 모금했던 것을 시작으로 1998년 설립 30주년과 2008년 설립 40주년 때도 기념행사와 장학기금 모금을 계속했다. 최근 5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서도 1억원 가까운 장학기금을 모았고 재단에 전달할 예정이다.

우산육영회는 고 우산 조차임 여사의 유언에 따라 1968년 설립됐다. 1905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한 고인은 30대 젊은 나이에 홀로돼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서울로 상경,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하루 한두 끼로 연명하다 노점상 주인의 후원으로 청계천변 우미관 옆에 국밥집을 개점했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또 한번 시련을 겪었으나 종로통에 다시 한식당을 개업해 모은 밑천으로 인왕산 자락에 있는 대저택을 매입, 최고급 전통요리집 ‘청운각’을 차렸다.

많은 난관 끝에 개점한 청운각은 1950년대 후반, 당시 정부의 고위 관리와 공기업, 언론기관 및 유수의 대기업 임원들이 찾는 모임장소가 됐고 한국의 근대화와 함께 국책사업이 다변화되면서 외국인 귀빈을 융숭히 대접할 수 있는 곳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국요식업계의 대부로 우뚝 선 조차임 여사는 양자 이두정 남양저축은행 대표를 비롯해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이 힘든 고학생들을 도왔으며, 장학사업과 학술사업을 펼쳐 국가발전에 기여하고자 전 재산을 털어 우산육영회를 설립했다.

우산육영회 1기 장학생 중 한명인 차흥봉 전 보건복지부장관은 “당시 장학금이 월 2만원, 연 24만원이었는데 모교 대학원 등록금이 한 학기 7000원, 하숙비가 한 달에 7000원이었다”고 말했다. 한 해 장학금으로 두 학기 등록금과 열두 달 하숙비를 내고도 14만원 넘게 남는 셈이다.

정인섭 우산동문회 회장(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국내에 장학재단이 1000개도 더 있겠지만 우산장학금을 받았던 장학생들은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며 “우산 장학금이 없었다면 대학원을 제대로 다닐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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