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혈 시민혁명’ 이끈 아르메니아 파시냔 총리대행, 조기총선 압승
옛 소련에서 독립한 아르메니아에서 ‘시민혁명’ 지도자가 이끄는 선거연대가 조기총선에서 압승했다. 아르메니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2월 9일(현지시간) 치러진 조기총선에서 니콜 파시냔(43) 총리대행이 이끄는 ‘나의 걸음’ 선거연대가 70.4%를 득표했다고 발표했다. 2위는 ‘아르메니아 번영당’으로 8.37%를 얻은 것으로 집계됐다. 투표율은 48.63%로 파악됐다. ‘나의 걸음’은 파시냔 총리대행이 대표인 ‘시민계약당’과 인권운동가 마누크 수키아샨의 ‘임무당’의 선거연대다.
파시냔 “시민의 손으로 혁명 의회 탄생”
이번 조기총선의 압승으로 파시냔 총리대행은 부패 추방과 빈곤 해소를 위한 개혁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는 정치적 구도와 동력을 확보했다. 개표 결과 발표 후 파시냔 총리대행은 “아르메니아 시민의 손으로 혁명세력이 다수인 의회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언론사 편집국장 출신의 파시냔은 지난 4월 당시 군소 야당 의원으로 지지자 수십명을 이끌고 세르지 사르키샨 전 대통령의 권력 연장 시도에 반발하는 시위에 불을 당겼다. 신흥재벌 등 소수의 권력독점에 따른 부패와 빈곤에 염증을 품은 아르메니아 민심은 대규모 시위로 폭발했다. 파시냔은 시위 10여일 만에 사르키샨 퇴진을 끌어내며 ‘무혈혁명’에 성공했다.
파시냔은 지난 5월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총리직에 올랐으나 의회는 사르키샨 전 대통령이 2017년 선거로 구성한 상태가 유지됐다. 기존 의회로는 개혁을 추진하는 데 한계를 느낀 파시냔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의회를 해산, 조기총선 승부수를 던졌다. 파시냔은 피 한 방울 없이 평화적 시위로 일군 아르메니아 ‘벨벳혁명’의 결실을 이루게 됐다.
지난 5월 아르메니아 의회는 파시냔 총리 선출안에 대한 표결을 진행해 찬성 59표, 반대 42표로 통과시켰다. 반정부 시위로 세르지 사르키샨(63) 전 총리가 사임한 지 보름 만의 일이었다. 당시 파시냔 총리 선출 소식이 전해지자 수도 예레반의 공화국광장에 모여 있던 수만명의 파시냔 지지자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환호했고 “파시냔, 파시냔”을 연호했다. 지지자들 앞에 선 파시냔은 “우리의 승리는 내가 아르메니아의 차기 총리로 선출된 게 아니라 아르메니아의 차기 총리를 우리가 결정했다는 것”이라며 “이제부터 아무도 아르메니아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당시 파시냔이 수십명과 함께 국립 라디오방송을 기습 점거하며 사르키샨 총리 선출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일 때만 해도 그는 밀리터리 디자인의 티셔츠와 검은색 야구모자를 특징으로 하는 선동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 규모가 순식간에 수만명으로 늘면서 야권 지도자로 등극, 국가 지도자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인구 290만명의 작은 내륙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라고 보도했다. 당시 정치평론가들은 파시냔의 총리 취임에 대해 “혁명은 승리로 일단락됐지만, 혼란은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번 조기총선 압승으로 이같은 전망은 보기좋게 어긋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