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8일] 한국, 21년전 태양열 이용한 교실 첫선

2011년 3월8일 상하이 핑크 빛 영문

▲영화 색계의 한 장면

2011년 3월8일 상하이 마타하리 사건이 한국 언론에 보도됐다. 중국 상하이 주재 한국 총영사 소속 3명이 재직당시 중국 한족 출신의 여성 덩아무개(당시 33세)씨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국가 기밀을 유출했다는 보도였다. 한국 정관계 인사 200여명의 휴대전화번호 등과 주상하이 총영사관 비상연락망, 비자발급 관련 자료, 외교통상부 관련 문서 등 각종 기밀문서가 유출한 정황이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공안당국의 미인계를 이용한 스파이활동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이 중국판 마타하리의 미인계에 한국 외교관만 걸려든 게 아니었다.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의 한 직원은 2005년 중국정부의 미인계에 걸려 기밀유출을 강요받다 자살했다. 전신관이란 직책으로 상하이 총영사관과 일본 외무성이 주고받는 기밀성 높은 문서를 다뤘던 이 일본인 영사관 직원은 노래방에서 사귄 중국여성과 불륜관계를 맺었다.

한-일 두나라 외교관은 똑같이 상하이 마타하리에 당했지만, 사후해결은 사뭇 달랐다. ‘마타하리 덩’과 밀애를 즐겼던 한국 외교관들은 발각될 때까지 관련 사실을 실토하지 않았고, 국가기밀정보를 그녀에게 가져다 바쳤다. 일본의 외교관은 국익을 배반할 수 없고, 부끄러운 외도행각이 드러나는 것도 꺼려 결국 자살을 택했다. 외교관 먹여 살릴 세금 내느라 국민들 쌔가 빠지는 것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매한가지다. 그래도 비교가 된다.

2005년 체첸 공화국 3대 대통령 암살당한 날

2005년 3월8일 체첸 분리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체첸 공화국의 제3대 대통령을 지냈던 아슬란 알리예비치 마스하도프(러시아어로 Аслан Алиевич Масхадов, 1951년 9월21일 출생)가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 북쪽 톨스토이 유르트에서 러시아 연방보안국 (FSB) 특수요원에게 암살당했다.

1996년 체첸 잠정 정권의 총리가 된 그는 1997년 러시아 연방군 철수 직후 시행된 체첸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돼 이츠케리아 체첸 공화국의 제3대 대통령이 됐다. 같은 해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 <평화와 상호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에 맞선 체첸 독립운동 지도자였지만, 그는 항상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방식으로 갈등을 조정하려고 애썼던 온화한 정치인이었다. 1998년 강경파들이 다게스탄을 침공했을 당시에도 러시아 연방과의 갈등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했다. 이후 2차 체첸 내전이 발발한 이후 대통령이 된 뒤에도 러시아 정부와 대화를 시도하려 하였다. 재임 당시인 2004년 발생한 최악의 ‘베슬란 인질 사건’ 당시 주모자 사밀 바사예프의 테러에 반대하는 등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와 공격을 자제시키려 노력했다. 무력이 아닌 외교로 체첸 독립을 이루려 했던 정치지도자였던 셈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그런 합리적 반군 수괴를 왜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제거했을까. 여기에는 지난 3월4일 3번째 러시아 대통령에 당선된 푸틴의 기질과 스타일이 숨겨 있다.

푸틴이 2선 대통령 재임 당시 그의 후임으로 연방보안국장을 맡았던 니콜라이 플라토노비치 파트루셰프 러시아 연방안전국 국장은 푸틴의 오른팔로 알려져 있다. 당시 마스하도프를 암살한 특수요원이 소속된 연방안전국장 자리를 푸틴이 물려준 것이었다.

파트루셰프는 1951년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그) 출생으로 푸틴과 고향도 갔다. 1975년부터 국가보안국 레닌그라드 지부에서 일하면서 푸틴과 알게 됐고, 이후 현재까지 약 37년간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두 집안은 가끔 샤슬릭(꼬치구이)을 구워 먹으며 술자리를 같이할 정도로 사이가 좋다고 한다. 체첸 반군의 온건한 지도자를 암살하는데 이견이 없을 정도로.

1979년 달성 국민학교서 첫 태양열교실 등장

1979년 3월8일 대구시 달서구(당시 경북 달성군) 소재 월배 초등학교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태양열 교실이 등장했다. 제2차 오일쇼크가 있었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에 걸쳐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와 금융세제 지원에 힘입어 태양열 주택을 비롯해 태양열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활발하게 건축된 결과다.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의 하루 평균 지표면 일사량은 1㎡당 3000㎉ 이상. 전문가들은 이 정도면 태양에너지 이용이 가능한 지역으로 분류한다.

유가파동이 있던 당시 온실가스 배출이 없는 신재생에너지인 태양에너지를 한국 정부가 장려했다는 것은 고무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석유 값이 안정세를 보이자 ‘설치비용이 많이 들어 경제성이 떨어지고 기술개발도 어렵다’는 이유로 태양열 시설들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다. 월배초등학교 태양열 교실도 1997년 노후한 시설과 건물들이 철거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21년 전인 1979년 이후 꾸준히 기술을 개발하고 조금씩이라도 규모를 늘여왔다면, 2012년에도 같은 소리를 하고 있을까.

1977년 카다피, 인민주권 선언

1977년 3월8일 당시 리비아의 지도자 무함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Qadhafi)는 제3세계이론에 입각한 인민주권선언을 발표했다.

1911년 이래 이탈리아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리비아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점령해 군정 통치한다. 종전 뒤 1949년 12월 UN은 리비아 독립지지 결의안을 채택, 2년 뒤인 1951년 12월24일 무함마드 이드리스(Muhammad Idris)를 국왕으로 하는 연방왕국을 건설했다.

1969년 9월1일 카다피 대위를 중심으로 한 청년장교 그룹이 트리폴리에서 무혈 혁명을 일으켜 수일만에 전국을 장악, 왕정을 폐지하고 리비아 아랍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리고 1977년 3월8일 총인민회의(General People’s Congress)가 카다피 지도자의 제3세계 이론에 입각한 인민주권 선언을 승인, 리비아의 독특한 인민직접 민주제도인 ‘자마히리야(Jamahiriya)’ 체제가 수립됐다. 자마히리야는 카다피가 직접 만든 용어로, 아랍어로 ‘대중의 국가’, ‘대중에 의한 공동체’를 뜻한다.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는 석유회사를 국유화하고 영국과 미국의 군사기지를 철폐했으며 이슬람 문화혁명을 시도했다.

이슬람율법에 따라 음주와 도박을 금지시키고 이슬람공동체에 기반을 둔 독자적인 직접민주제를 이끌어왔다. 카다피는 국제적으로 테러국의 지도자이지만 국내에서는 열광적인 지지자들에 쌓여 독특한 체제를 수립해 전권을 장악한 정치인이라는 야누스의 두 얼굴을 갖고 있다.

2011년 10월20일 카다피는 죽었지만, 이것이 리비아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긍정적 신호탄이 되지는 못했다. 리비아는 동서 2개 나라로 쪼개질 운명에 쳐했고, 리비아 시민혁명 과정에 개입했던 나토와 미국 등 서방국가들에 대한 북아프리카와 중동, 이슬람권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카다피의 절친한 친구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만델라가 평생을 바쳐 흑인들의 인권신장을 위해 싸웠다고 아프리카나 중동이 서방국가들의 위협이 사라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1908년 여성의 날의 기원

1908년 3월8일 미국 여성 섬유 노동자 1만5000여명이 뉴욕에서 생존권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봉제업체 여종업원들이 대부분인 시위대는 여성참정권과 미성년자 노동금지,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요구했다. 대규모 여성시위 날짜가 1908년 2월28일이라는 자료도 있다.

그 2년 뒤인 1910년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제트킨의 제창으로 3월8일이 ‘세계 여성의 날’로 정해졌다. ‘여성의 날’ 미국에서는 3월 내내 여성계의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지고 중국에서는 공식휴일로 정해져 잔치가 벌어진다. 한국은 1920년대에 처음 ‘세계 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열렸지만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행사를 무산시켰다가 1980년대 들어 재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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