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수학의 개척자 이상설②] 130년전 ‘수리’ 붓글씨 본 간행
[아시아엔=이상구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 이상설이 수학을 공부한 시기는 한국 수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시기가 한국 수학사에서 신구 수학이 양립·병행한 중첩의 기간을 공식적으로 결정한다는 점이다. 고종 25년(1888)에도 산사 17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상설은 ‘신구 수학 교체’의 시기 중에서 신구 수학이 양립·병행한 중첩기에 수학을 학습한 셈이다. 인하대 역사학과 윤병석 교수의 논문에 기록된 아래의 평가는 이상설의 수학적 식견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특히 수학에 있어서는 이상설이 제1인자로 칭송되고 또한 가장 먼저 학계에 (서구) 수학을 수용한 인물인 것 같다. 그 무렵에 (일본에서 지형측량을 배우고 돌아온) 남순희(南舜熙)가 수학으로는 이름이 높았으나 고등수학에 있어서는 이상설이 독보적인 존재로서 이상설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는 1886~1887년경에 이미 <수리>(數理)라는 책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다. 윤병석은 이상설이 1886년과 1887년 사이에 붓으로 쓴 수학 책 <수리>의 존재를 1984년 일찌감치 학계 최초로 알렸다. 한국수학사학회 회원인 오채환씨를 통해 이 책을, 이상설 유품의 일부를 소장해 온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중앙대 이문원 명예교수가 가지고 계시다고 확인하였다.
이문원교수의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수당 이남규(李南珪) 선생으로 187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참판(參判)을 지낸 분이다. 1907년 일본군에게 연행되어 온양까지 끌려가다가 아들 충구(독립유공자)와 함께 피살되었다. 이남규의 손자 승복(독립유공자)이 독립유공자 이동령(李東寧)의 부관으로 러시아에서 이상설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유품의 일부를 물려받아 (유언에 반하여 일부를 태우지 않고) 그간 보관해왔다고 하였다. 이승복의 동생(이문원교수의 작은아버지)이 이상설의 사위여서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판단된다. 예산에 수당기념관이 있다. 이승복은 13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 러시아, 만주, 조선 등지에서 활동한 임시정부 산하 비밀조직인 ‘연통제’ 요원이었으며, 1920년대 후반에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결성된 대표적인 항일단체 ‘신간회(新幹會)’의 강령을 만든 주역이었다고 한다.
이상설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아들은 월북한 것으로 알려지며, 따라서 근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남은 가족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지게 된 듯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된 <수리> 복사본을 분석한 결과 <수리>의 전반부는 중국 근대수학 책인 <수리정온>을 읽으면서 저자가 새롭게 익힌 내용을 중심으로 발췌한 것임이 파악되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후반부에는 <수리정온>이나 이전의 다른 조선 산학 책에서는 전혀 소개되지 않은 근대수학의 새로운 개념들이 국내 최초로 소개된 것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서양에서 사용하던 근대식 수학기호가 처음으로 이 책에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수리>의 후반부의 내용이 중국이나 일본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온 서양수학이 아니고 선교사를 통하여 들어온 서양수학을 다룬 것이므로 저자가 헐버트와 교류를 가진 후와 <산술신서>(1900)를 저술하기 이전에 <수리>를 저술한 것이 되며, 분석에 따르면 붓글씨로 쓴 책 <수리>는 이상설이 언제라도 서양수학에 대하여 가르칠 수 있는 강의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수리> 표지 뒷면에 “戌亥 山房 溥齋 主人 書 自 九月七 潮澣(파도 조 청소한)”라는 기록이 있다. 앞의 두 글자가 연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면 60갑자 중 12간지부분만 이어지는 두 해인 ‘술해’로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즉 “술(戌)년과 해(亥)년 사이에 (1886년 또는 1898년과 1887년 또는 1899년 사이에) 산방(山房)에서 보재(溥齋)가 주인(主人)으로 9월7일에 후련하게 저술을 마쳤다”고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