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1일] 여수 출입국관리소 참사 5주년

2011년 소설 <모비딕> 포경선 188년 만에 발견

2011년 2월11일 소설 <모비딕>에 등장한 포경선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823년 2월11일 당시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태평양 하와이섬 근처를 지나다가 산호초에 좌초됐던 포경선 ‘투브라더스’호(號)가 꼭 188만에 등장한 것이다.

소설 <모비딕>에서는 포경선 ‘에식스’호(號)로 나오는 침몰한 포경선 투브라더스호가 해양고고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육지로 인양할 수 있었다. 세계 최대 해양보호구역인 파파하노모쿠아키아 해양국립기념물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투브라더스호 잔해 발견 소식을 발표했다. 이번 탐사를 주도한 해양고고학자 켈리 글리슨은 2008년 하와이 근처 ‘프렌치 프리깃’ 모래톱 근처 바닷속을 조사하던 중 닻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배 대부분은 188년간 하와이 연안의 따뜻한 물속에 잠겨 있으면서 완전 분해됐지만, 작살과 고래기름 정제용 냄비, 솥 등이 산호초에 둘러싸인 채 발견됐다.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한 조지 폴라드 선장은 목숨을 구했지만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없었다. 폴라드 선장은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이 탄생하는 데 영감을 준 ‘에식스’호의 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1820년 11월20일 에식스호가 태평양에서 거대한 향유고래에 받혀 침몰하면서 살아남은 폴라드 선장과 선원들은 배 3척에 나눠 타고 귀향길에 올랐다. 이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물과 식량 없이 3개월간 표류하면서 인육까지 먹었다. 3년 만에 다시 항해에 나섰던 폴라드 선장은 ‘투브라더스’호마저 침몰하자 결국 뱃사람으로서의 꿈을 접었다. 바다와 고래는 자신들에게 도전한 폴라드 선장을 통해 인류에 경고음을 보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음은 지난 2003년 별세한 그레고리 팩을 기리며 그가 주연 영화을 소개한 동영상.


2009년 인공위성 사상 첫 충돌

2009년 2월11일 오전1시55분(한국시각) 러시아 시베리아 타이 미르 반도 789㎞ 상공의 우주에서 두개의 온전한 인공위성이 사상 처음 충돌했다.

사고 위성은 1993년에 발사된 러시아 코스모스 2251 통신위성(중량 900㎏)과 1997년에 발사된 미국 이리듐사의 33 통신위성(560㎏)이었다. 그 중 코스모스 2251호는 수명이 다해 방치된 위성이었다. 미항공우주국(NASA)에 따르면 지금까지 궤도상에서 일어난 충돌 사건은 모두 4차례지만, 소진된 로켓이나 소형 위성의 부품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NASA는 2009년 현재 우주에는 위성만 6000개가 떠 있다고 밝혔다.

사고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지구 궤도 내 위성 수가 너무 많다고 지적해왔다.


2008년 동티모르 대통령 관저서 피격…복부 총상

2008년 2월11일 아침 7시쯤(현지시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호세 라모스-호르타 동티모르 대통령이 수도 딜리 외곽에 있는 자택에서 반군들이 쏜 총에 맞아 복부에 중상을 입었다.

같은 시각 대통령 자택에서 반군과 경호원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반군 지도자인 알프레도 레이나도 소령은 사살됐다. 경호원도 1명이 사망했다. 라모스-호르타 대통령은 앰뷸런스에 실려 호주군이 운영하는 수도 딜리의 야전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수술을 받았다. 반군들이 같은 시각 사나나 구스마오 총리 관저에도 총격을 가했으나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동티모르 독립을 위한 비폭력 투쟁의 공로로 199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라모스-호르타는 초대정부에서 외무?내무?국방장관을 역임하다 동티모르 사태 발생 직후인 2006년 7월 구스마오 당시 대통령에 의해 총리에 임명됐다.

라모스-호르타는 총리 신분으로 작년 5월에 실시된 대선에 뛰어들어 압승을 거둔 뒤 구스마오의 뒤를 이어 제2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구스마오는 총선을 거쳐 총리직을 맡아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이 뒤바뀌었다.

이날 사살된 반군 지도자 레이나도 소령은 동티모르 사태 직후인 2006년 7월 살인과 불법무기소지죄로 추종자 20명과 함께 체포돼 수감됐으나 그해 8월31일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독립을 반대하는 민병대원 등 56명과 함께 탈옥해 피신 중이었다. 레이나도 소령이 이끄는 반군의 폭동으로 촉발된 동티모르 사태는 폭력조직간 교전으로 번져 37명이 숨지고 15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었다.

2007년 여수 출입국관리소 불, 외국인 27명 사상

꼭 5년 전인 2007년 2월11일 오전4시5분께 전남 여수시 화장동 법부무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외국인 수용시설에서 불이 나 보호 중이던 외국인 10명이 숨지고 17명이 다쳤다.

당시 관리사무소에는 남자 51명, 여자 4명 등 모두 55명이 수용돼 있었으며 불은 7개방이 나눠져 있던 3층에서 발생했다. 이들은 밀입국 등의 혐의로 붙잡혀 이 보호시설에 수용돼 조사를 받고 있는 상태였으며 중국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방당국은 소방차 27대와 소방관 등 진화 인력 120여명을 투입, 1시간여 만에 불길을 잡았다. 하지만 보온을 위해 깔아놓은 우레탄에서 유독가스가 발생한데다 도주 방지 등을 위해 쇠창살이 설치돼 있어 짧은 화재시간에도 인명피해가 컸던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사고 4주기 때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와 다문화 가족상담센터 발표에 따르면, 부상자 가운데 14명은 당시까지 한국 내에 머물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치료를 받고 있었다. 중국 국적의 불법체류자였던 부상자들은 다문화 가족상담센터의 신원보증을 통해 서울, 천안, 목포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2~3명은 여전히 심한 불안증세 등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법무부는 부상자들의 치료를 위해 2010년 당시 만료된 체류기간(3년)을 연장했다. 치료비도 정부가 부담했다. 다만 취업이 불가능한 G1 비자로 국내에 머물고 있어 생계가 어렵고 다시 쫓겨날까 봐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

한국의 시민단체 ‘여수연대회의’와 ‘여수진보연대’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많은 희생자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고작 건물을 확장하고 스프링클러를 설치한 게 전부하면서 “반인권적 외국인 단속추방을 중단하고 미등록 이주민을 양산하는 정책을 개선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또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주거나 일부 인권 선진국 사례처럼 영주권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1970년 일본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

동경대 우주항공연구소가 1970년 2월11일 일본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이날 오후 1시25분 길이 4.9m의 인공위성을 지구궤도로 진입시키는 데 성공, 일본은 세계에서 4번째로 위성을 발사한 국가가 됐다.

이날 동경대 우주개발관측소로부터 발사된 람다 L4S형5호라는 우유빛의 이 위성은 순조롭게 1단계, 2단계, 3단계로 분리돼 6분47초 후에 계측기기를 탑재한 4단계 로케트에 점화, 초속 약 8Km의 속도로 인공위성궤도에 올랐다. 위성부분은 중량 23.1Kg이고 탑재기기는 9.4Kg이었다. 위성은 발사지점인 오오스미(大隅)반도와 연관해 `오오스미`라고 명명됐다.

이 위성은 미국, 소련, 프랑스의 초기 위성과 달리 고연체료를 사용했고 무수도중력턴 방식을 채택, 세계에서 가장 저렴하고 간단한 방법으로 발사됐다.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

6.25 한국 전쟁 발발 후 약 7개월이 지난 1951년 2월11일 남한의 국군이 게릴라전을 벌이던 북한 인민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일대 주민 570명을 무참히 학살했다.

중공군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되면서 남한 내에서 북측에 협력하는 민간인과 북한 게릴라들의 공세가 강화되자 당시 공비토벌 작전을 벌이고 있던 국군 11사단 9연대(연대장 오익경(吳益慶) 대령) 3대대(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가 부락주민을 내탄부락과 박산계곡에서 잔혹하게 죽인 사건이다.

나중에 한동석 소령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자신의 지시로 대대원들이 공비들과 내통한 자 187명을 학살했다. 한 소령의 직접 지휘로 부락민들은 신원초등학교에 모두 집합했다. 군·경·공무원과 유력인사의 가족만을 가려낸 뒤, 인근 박산(朴山)으로 데려가 총살했다.

이 사건은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한 사병이 엄상섭 의원에게 폭로, 국회 조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국군 1개 소대를 공비로 가장해 위협적으로 총격을 가하는 등 조사를 방해했다.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 대령이 국군 1개 소대를 무장공비로 위장시켜 위협 총격을 가했다. 사건을 은폐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끈질긴 추적과 재조사로 양민학살사건과 조사방해사건의 진상이 공개됐다. 내무-법무-국방 3부장관이 사임했고, 9연대장과 3대대장에게는 무기징역이, 경남지구 계엄사령관에게는 3년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됐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유족 70여 명이 보복책으로 당시의 면장 박영보(朴榮輔)를 끌어다 생화장(生火葬)하는 참사로 이어졌다.

관련 2012년 11월22일 부산고법 판결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50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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