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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오늘의 시] ‘빈집’ 기형도(1960~1989)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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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숨’ 이병률 “신은 인간에게 채찍 대신 마스크를 나눠주었다”
서로 가까이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며 신은 인간에게 채찍대신 마스크를 나눠주었다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입을 가만히 두라는 뜻이었을까… 몇백년에 한번 사랑에 대해 생각하라고 신이 인간의 입을 막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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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바람이 불어오면’ 박노해
에티오피아 고원에 바람이 불어오면 아이들은 어디로든, 어디로든 달려 나간다 초원을 달리고 흙길을 달리고 밀밭을 달린다 허기를 채우려는지 온기를 찾는 것인지 소년은 소녀를 만나고 친구는 친구를 부른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내 영혼은 달려 나간다 어디로든, 어디로든, 그리운 네가 있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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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가을 法語’ 장석주
태풍 나비 지나간 뒤 쪽빛 하늘이다. 푸새것들 몸에 누른빛이 든다. 여문 봉숭아씨방 터져 흩어지듯 뿔뿔이 나는 새 떼를 황토 뭉개진 듯 붉은 하늘이 삼킨다. 대추 열매에 붉은빛 돋고 울안 저녁 푸른빛 속에서 늙은 은행나무는 샛노란 황금비늘을 떨군다. 쇠죽가마에 괸 가을비는 푸른빛 머금은 채 찰랑찰랑 투명한데, 그 위에 가랑잎들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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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길’ 박노해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아무것도 두려워 마라 그대는 충분히 고통받아 왔고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자신을 잃지 마라 믿음을 잃지 마라 걸어라 너만의 길로 걸어가라 길을 잃으면 길이 찾아온다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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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감사하다’? ?정호승
태풍이 지나간 이른 아침에 길을 걸었다 아름드리 프라타너스나 왕벚나무들이 곳곳에 쓰러져 처참했다 그대로 밑동이 부러지거나 뿌리를 하늘로 드러내고 몸부림치는 나무들의 몸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키 작은 나무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쥐똥나무는 몇 알 쥐똥만 떨어드리고 고요했다 심지어 길가의 길가의 풀잎도 지붕 위의 호박넝쿨도 쓰러지지 않고 햇볕에 젖은 몸을 말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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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시마詩魔’ 이병기(1891~1968)
그 넓고 넓은 속이 유달리 으스름하고 한낱 반딧불처럼 밝았다 꺼졌다 하여 성급한 그의 모양을 찾아내기 어렵다 펴 든 책 도로 덮고 들은 붓 던져두고 말없이 홀로 앉아 그 한낮을 다 보내고 이 밤도 그를 끌리어 곤한 잠을 잊는다 기쁘나 슬프거나 가장 나를 따르노니 이생의 영과 욕과 모든 것을 다 버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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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나의 家族’ 김수영
古色이 蒼然한 우리집에도 어느덧 물결과 바람이 新鮮한 氣運을 가지고 쏟아져들어왔다 ? 이렇게 많은 식구들이 아침이면 눈을 부비고 나가서 저녁에 들어올 때마다 먼지처럼 인색하게 묻혀가지고 들어온 것 ? 얼마나 長久한 歲月이 흘러갔던가 波濤처럼 옆으로 혹은 世代를 가리키는 地層의 斷面처럼 억세고도 아름다운 색깔ㅡ ? 누구 한 사람의 입김이 아니라 모든 家族의 입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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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 ‘코스모스를 노래함’ 오규원
거리에서, 술집 뒷골목에서, 그리고 들판에서 가을은 우리를 역사 앞에 세운다. 거리에서 가을은 느닷없이 1906년 2월 1일, 일본이 한국통감부를 설치한 일을 아느냐고 묻는다. 술집 뒷골목에서 조금씩 비틀거리는 내 앞을 가로막고 1960년 4월 25일에 대학 교수단 데모가 있었다고 말한다. 1960년 5월 29일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하고, 1910년 6월 24일에는 구한국이 일본에 경찰권을 이양, 1885년 10월 8일에는 일본인이 민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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