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의무병과 발전세미나에서 우크라이나의 전상자 후송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전선 깊숙한 곳에 고립된 부상병을 구하기 위해 드론을 띄우고, 적의 공격을 피하려고 여러 대의 유인용 드론까지 동원한다는 내용이었다. 한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적지 않은 자원과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강사는 우크라이나에서 한 병사가 오랫동안 전방에 고립되어 있었던 사례도 소개했다. 두 발을 심하게 다친 상태에서도 상당 기간 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정보를 보냈다고 한다. 그를 구출하기 위해서도 복잡한 작전이 필요했다.
강연의 마지막 문장이 오래 남았다. “군인 한 명은 숫자 1이 아니다.”
민주국가에서 국민은 주권자다. 군인도 그 주권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군대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부상당한 군인은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하는 인력이 아니라, 바로 그 군대가 지켜야 할 대상이 된다.
질의응답 시간에 러시아와 북한의 의무체계에 관해 질문했다. 강연자는 독재국가에서는 부상병을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고 답했다. 물론 국가와 군대의 의무체계를 몇 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답변을 들으며 한 가지 차이를 생각했다. 병사를 전투에 투입하는 것과 부상당한 병사를 끝까지 책임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문득 프랑스의 군의관 도미니크 장 라레가 떠올랐다. 나폴레옹 시대의 그는 말이 끄는 이동식 구급차, 이른바 ‘날아다니는 구급차(ambulances volantes)’를 만들었다. 부상병을 전장에서 신속하게 후송하고 치료하기 위한 체계였다. 라레의 업적은 단순히 구급차를 발명한 데 있지 않다. 부상병이 생기면 가능한 한 빨리 찾아내고 치료한다는 원칙을 군대 안에 세운 데 있었다.
병사들은 자신이 다치더라도 누군가 데리러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라레의 구급차는 말과 수레로 움직였지만, 그 안에는 병사들의 신뢰가 실려 있었다. 그 신뢰가 전투 의지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수많은 병사 가운데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는 이야기다. 전쟁의 승패나 작전의 효율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질문이 그 영화에 담겨 있다. 국가는 한 사람의 병사를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는 말이 끌던 구급차 대신 드론이 부상병을 찾아 나선다. 전쟁의 기술은 달라졌지만, 병사를 대하는 원칙은 달라져서는 안 된다. 전장에서 쓰러진 병사를 찾아내고, 후송하고, 치료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전투의 부수적인 업무가 아니다. 군대가 존재하는 이유와 맞닿아 있다.
오늘 세미나에서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예전에 얼굴에 파편상을 입은 한 장교를 진료한 적이 있다. 지뢰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고 얼굴에도 파편이 박혀 있었다. 나는 얼굴의 파편을 제거했고, 이후 다시 만날 기회가 없어 그 뒤의 소식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그가 일반병실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사단에서 근무했던 의무대 주임원사를 통해서였다. 짧은 소식이었지만 마음이 놓였다.
그 장교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전장에서 살아 돌아왔고, 지금 회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부상병의 치료는 수술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재활과 의수·의족, 가족과 사회로 돌아가는 과정까지가 치료의 일부다.
군대는 적을 발견하고 먼저 타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군이 쓰러졌을 때 찾아내고, 구해내고, 끝까지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도 군대의 전투력이다.
병사 한 명은 숫자 1이 아니다. 그에게는 이름이 있고, 가족이 있고, 살아갈 내일이 있다. 그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군대가 움직인다는 믿음. 어쩌면 병사가 전장에 나설 때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믿음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부상당해도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