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칼럼

[황건 칼럼] 아무 대화나 선문답은 아니다

선문답은 스님들이 주고받는 재치 있는 말이나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응수가 아니다. 선불교에서 스승과 제자가 깨달음의 문제를 놓고 주고받는 문답이다. 때로는 상식과 논리를 뒤집는 짧은 말 한마디가 수행자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본문에서 <AI 생성 이미지>

최근 정치권에서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일화가 화제가 되었다.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자, 대사는 부처처럼 보인다고 답했다. 반대로 무학대사의 모습을 돼지 같다고 말한 이성계에게 대사는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는 법입니다.”

흔히 불안돈목(佛眼豚目)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이야기다. 상대를 바라보는 눈에는 자신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교훈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선문답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조금 망설임이 생긴다.

과연 선문답이란 무엇일까?

선문답은 스님들이 주고받는 재치 있는 말이나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응수가 아니다. 선불교에서 스승과 제자가 깨달음의 문제를 놓고 주고받는 문답이다. 때로는 상식과 논리를 뒤집는 짧은 말 한마디가 수행자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벽암록》을 비롯한 대표적인 공안집을 살펴보아도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이 대화는 찾기 어렵다. 두 사람이 실제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동시대의 역사적 기록도 아직 확인하기 어렵다. 후대에 전해진 설화와 선불교의 공안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기는 곤란하다.

물론 공안집에 실리지 않은 선문답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재치 있는 대화에 선문답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비슷한 이야기는 중국에도 있다. 송나라 문인 소동파와 불인요원(佛印了元) 선사의 일화다.

소동파는 어느 날 자신이 여덟 가지 세속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의 게송을 지어 불인 선사에게 보냈다.

‘팔풍취부동(八風吹不動), 단좌자금대(端坐紫金臺).’ 여덟 가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금빛 연화대에 단정히 앉아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불인 선사는 그 글을 읽고 단 두 글자를 적어 돌려보냈다고 한다. ‘방비(放屁).’ 방귀를 뀌었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하면 ‘헛소리’쯤 될까.

소동파는 화가 나서 강을 건너 선사를 찾아갔다. 그러자 불인 선사는 팔풍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더니 헛소리라는 두 글자에 강을 건너왔느냐고 되물었다.

이 일화 역시 전해지는 이야기의 세부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동파와 불인요원이 실제로 교유했다는 사실은 소동파 자신의 문집으로 확인할 수 있다.

소동파의 문집에는 〈여불인선사삼수(與佛印禪師三首)〉라는 서간이 남아 있다. 그는 불인을 선사라고 불렀으며, 자신의 영전이 선사의 기도 덕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마납찬(磨衲贊)〉에는 불인의 가사에 얽힌 법문을 듣고 글을 지은 흔적도 남아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단순한 농담 이상의 지적·종교적 교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소동파와 불인의 모든 대화를 공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문답과 선화(禪話), 공안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똑같은 말은 아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도 있다. 같은 물을 보더라도 보는 존재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물을 사람은 물로 보지만, 물고기는 집으로 여기고, 천상의 존재는 보배로운 유리로 본다는 식이다.

이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과 인식에 따라 세계가 달라진다는 가르침은 깊이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불교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비유와 역사적 인물들이 실제로 나눈 대화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자유다. 한문으로 쓰든 한글로 쓰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말에 선문답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그에 걸맞은 맥락과 의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는 말은 아름답다. 하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눈에는 자비만큼이나 분별도 필요하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알아보는 것도 지혜의 한 부분일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불교계에서도 한마디쯤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찾아본 범위에서는 이 문제를 직접 다룬 목소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모두 묵언수행 중이신가?

묵언수행은 수행자의 선택이니 존중해야 한다. 그렇지만 침묵이 언제나 지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의 언어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불교를 비판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가르침을 아끼기 때문에 정확하게 부르자는 뜻이다.

산문 밖을 날아가는 작은 새 같은 나그네가 잠시 지저귀어 본다.

짹짹.

아무 대화나 선문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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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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