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

김여정의 ‘달구지’ 발언에서 떠올린 대승의 큰 수레…누구를 태울 것인가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사진=조선중앙TV 방영분 중 일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라는 말을 떠올리면 수레의 크기가 눈에 들어온다. 승(乘)은 수레라는 뜻이다. 대승(大乘)은 큰 수레이고 소승(小乘)은 작은 수레다. 대승불교는 자신만의 해탈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겠다는 보살의 이상을 강조했다. 다만 소승이라는 명칭은 대승 측에서 기존의 불교 전통을 비판하며 붙인 이름이므로, 오늘날 부파불교 전체를 가리키는 중립적인 명칭으로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큰 수레라는 말은 불교의 경계를 넘어 일상에서도 쓰인다. ‘대승적 차원에서 생각하자’고 할 때, 우리는 당장의 이해관계나 자기편의 유불리를 넘어 더 넓은 공동체의 이익을 생각하자는 뜻을 담는다. 노아의 방주도 문득 떠오른다. 홍수 속에서 생명을 보존하는 방주처럼, 큰 수레는 더 많은 생명을 태우고 함께 건너가는 공간으로 상상할 수 있다. 물론 두 종교적 이미지의 배경은 서로 다르다. 다만 누구를 태우고 어디로 향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두 이미지가 만난다.

그렇다고 수레가 크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큰 수레를 자처하면서 자기편만 태운다면, 그 안에는 작은 수레의 마음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작은 수레라도 어려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면 그 의미는 달라질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수레의 크기만이 아니라 누구를 태우며, 누구를 밖에 남겨두는가 하는 문제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북한의 한 담화에서 ‘지금 정권의 달구지에 몸을 실은 자들’이라는 표현을 보았다. 달구지는 소가 끄는 전통적인 짐수레다. 이 문맥에서 달구지는 특정 정권을 낮추어 부르는 비유이고, 그 위에 올라탄 사람들은 그 정권에 속하거나 협력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힌다. 수레의 이미지에 기대어 정권과 그 구성원을 한꺼번에 조롱한 셈이다.

달구지라는 낱말에서 나는 뜻밖에도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을 떠올렸다. 자기들끼리 올라타고, 자기들끼리 이해를 나누며, 밖에 있는 사람들의 사정에는 무심한 폐쇄적인 공간 말이다. 물론 달구지 자체가 그런 뜻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그 문장을 읽으며 덧붙인 생각이다.

큰 수레와 달구지. 하나는 더 많은 이를 태우는 넓은 공간으로, 다른 하나는 자기편만 올라탄 폐쇄적인 공간으로 상상되었다. 그러나 큰 수레라고 반드시 대승적인 것은 아니고, 달구지라고 반드시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누구를 태우고 어디로 향하느냐일 것이다.

우리는 종종 대승적 차원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수레에는 과연 누가 타고 있는가. 아직 올라타지 못한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워두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탄 사람들의 자리와 이익을 지키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는가.

수레의 크기를 재기 전에, 그 수레가 향하는 곳부터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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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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