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항쟁 46주년④] ‘폭도’라는 낙인, 언론은 사북을 어떻게 기록했나

신군부 보도통제 속 나흘 만에 알려진 항쟁…경찰·광부·노조지부장 가족의 서로 다른 기억
1980년 4월 강원도 정선군 사북에서 발생한 사북항쟁은 오랫동안 과격한 노동분규로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 지프차 돌진으로 촉발된 항쟁과 노사정 합의 이후 이어진 연행·고문 등 국가폭력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2026년 8월 대통령의 공식 사과에 이어 10월 21일 제46주년 기념식에서 처음으로 대통령 기념사가 전달될 예정이다. 아시아엔은 정선지역사회연구소가 발간한 『사북항쟁 일문일답』과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사건의 발단과 전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삶, 진실규명과 화해의 과제를 5회에 걸쳐 살펴본다. 자료집의 해석과 공식 조사에서 확인된 사실은 구분해 전한다. <편집자>
1980년 4월 21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에서 광부들의 대규모 항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주요 신문들이 사북의 소식을 전한 것은 나흘 뒤인 4월 24일이었다. 당시는 비상계엄 시기였다. 언론은 계엄당국의 검열과 보도통제를 받고 있었다.
정선지역사회연구소가 발간한 『사북항쟁 일문일답』에는 1980년 4월 24일자 보도지침이 소개돼 있다. 사북 관련 기사의 보도를 허용하면서도 광부들의 무기고 장악이나 계엄군 파견 관련 내용은 보도하지 못하도록 제한했다는 것이다. 당시 신문들은 사북에서 발생한 사건을 ‘사북사태’로 표현했다. 광부들의 집단행동과 경찰관 사망, 폭력 장면이 주요하게 다뤄졌다.
그러나 사건의 발단이 된 경찰의 노동운동 사찰과 지프차 돌진, 노사정 합의 이후 이어진 연행과 고문 문제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독자들은 광부들이 임금인상과 노조 문제에 불만을 품고 집단행동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한 것으로 사건을 기억하기 쉬웠다.
실제로 사북항쟁의 출발점에는 임금과 노조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경찰관이 사망하고 노조지부장의 아내가 폭행당한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만으로 사건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광부들이 왜 경찰과 직접 충돌하게 됐는지, 노사정 합의 이후 왜 다시 대규모 검거가 이루어졌는지, 연행된 주민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까지 살펴야 한다.
언론은 사건을 전달하는 역할뿐 아니라 사회가 무엇을 기억할지 결정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사북사건은 그 점에서 한국 언론사에도 질문을 던진다.
당시 언론인들은 국가의 검열과 보도통제 아래 있었다. 일부 신문은 사건 이후 광부들의 열악한 생활환경과 노동문제를 다루며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군부가 사건을 규정한 용어와 설명 방식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사북항쟁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했다. 이후 한국 사회의 관심이 광주에 집중되면서 사북 광부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잊혔다. 자료집은 당시의 언론통제와 사건을 둘러싼 부정적 인식, 사건 당사자들의 사회적 위치가 사북항쟁의 역사적 재평가를 어렵게 했다고 분석한다.
사북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중심이 된 사건이었다. 지역적으로도 서울에서 먼 탄광촌이었다. 항쟁을 이끈 주요 인물들은 사건 이후 구속과 실직, 차별을 겪었다. 이런 조건에서 당사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사회적으로 알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역사적 평가를 어렵게 만든 또 다른 문제는 사건 관계자들 사이에 남은 상처였다. 1980년 4월 22일 경찰 진압작전 과정에서 이덕수 순경이 사망하고 여러 경찰관이 다쳤다. 같은 날 당시 노조지부장 이재기의 아내 김순이 씨는 일부 광부와 주민들에게 붙잡혀 폭행당했다. 김씨와 가족들은 오랫동안 이 사건의 피해를 안고 살아왔다.
반면 항쟁에 참여했던 광부들과 가족들은 이후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됐다. 일부는 자신들의 행동이 폭력사건으로만 기억되는 상황에 억울함을 호소해 왔다. 여기에는 간단히 한쪽을 가해자, 다른 쪽을 피해자로 구분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특정 사건에서는 피해자였던 사람이 다른 사건에서는 가해 행위에 관여했을 수도 있다. 국가폭력의 책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항쟁 과정에서 발생한 개별 폭력의 피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은 자료집 머리말에서 이를 ‘진실의 중층성’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한다. 사건을 바라보는 위치와 경험에 따라 증언은 달라질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이루어진 기록을 모아야 사건의 실체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박봉남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1980 사북>에서도 나타난다. 영화는 광부들의 항쟁과 고문 피해를 중심으로 사건을 추적하면서도 당시 진압에 참여했던 경찰관, 노조지부장 가족, 광부와 주민들의 서로 다른 목소리를 함께 담았다.
자료집에 따르면 제작진은 100명이 넘는 관계자를 인터뷰하고 160회 이상 촬영했다. 광부들의 투쟁뿐 아니라 사건 이후 가족과 자녀들의 삶에 남은 상처에도 주목했다. 영화는 2024년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장편 대상을 받았고, 2025년 10월 전국 극장에서 개봉했다. 사북사건을 기억하는 새로운 방식이 시민사회와 영화 제작 현장에서 시도된 셈이다.

정선지역사회연구소는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의 집단행동을 ‘사북항쟁’으로 부르면서, 그 이후의 검거와 고문, 장기간의 피해까지 포함하는 전체 과정을 ‘사북사건’으로 설명한다. 용어의 차이는 단순한 표현 문제가 아니다. 어느 시기와 어떤 피해까지 사건의 범위에 포함할 것인지에 관한 역사적 인식의 차이이기도 하다.
46년이 지난 지금 언론이 사북항쟁을 다시 다루는 이유는 과거의 보도를 일방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당시 확인하지 못했던 사실을 찾아내고, 소외됐던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서로 다른 기록을 비교해 사건의 전체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는 광부들의 인권뿐 아니라 경찰관과 노조지부장 가족의 피해도 함께 살펴야 한다.
어느 한쪽의 고통을 인정하는 일이 다른 쪽의 고통을 부정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북의 역사가 오늘날 언론에 던지는 질문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사건의 일부만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지 않았는가.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다른 사람의 기억을 지워버리지는 않았는가.
사북항쟁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는 누군가의 기억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충분히 기록되지 않았던 사실과 목소리를 더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