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재 정선의 그림을 보러 갔다가 한 작품 앞에 오래 머물렀다. 그림 속 두 노인이 마주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은 ‘시화환상간(詩畫換相看)’.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본다는 뜻이다.
집에 돌아와 시를 찾아보았다.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꾸어 감상하니, 어느 것이 더 귀하다며 값을 논하겠는가. 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고 그림은 손을 움직여 그리니, 어느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려운지 알 수 없구나.” (我詩君畫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詩出肝腸畫揮手 不知誰易更誰難)
시와 그림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지만, 그 가치를 단순히 견주기는 어렵다는 뜻으로 읽힌다.

문득 대구에서 개원한 한 성형외과 의사가 떠올랐다. 나보다 두 살 위인 그는 진료와 수술을 하면서 그림도 그린다. 재작년 대구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어머니를 모시고 찾아갔다. 전시가 끝난 뒤 그는 작품 한 점을 내게 선물했다. 해인사에서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목련이었다. 제목은 ‘만개’였다. 그 유화는 지금도 내 연구실에 걸려 있다.
올해 목련이 필 무렵, 나는 그림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림 속 목련과 실제 목련을 한 화면에 담아 사진을 찍었다. 그림이 자연을 옮겨 놓은 것이라면, 사진은 그림과 자연을 다시 한자리에 불러 모은 셈이었다. 그 사진을 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미술전람회에 출품했다. 장려상을 받았다.
이번에 학회 참석차 대구에 갔을 때 그를 찾아갔다. 바쁜 그를 잠깐 만나 그림 속 목련과 실제 목련을 함께 담은 사진 액자를 건네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선물받은 작품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는 감사의 표시였다.
그가 답장을 보내왔다. “제 작품을 소중하게 아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먼 길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는 그에게 겸재의 그림을 보고 쓴 글도 보냈다. 간송의 방에서 겸재의 그림을 마주한 이야기를 담은 글이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황 교수님은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시군요. 본받고 싶은데 너무 멀리 와 버렸네요~ㅎ”
그의 그림을 바라보며 보낸 시간이 나에게는 글이 되었고, 그 글은 다시 그에게 돌아갔다. 그가 그린 목련은 내 연구실에서 사진이 되었고, 그 사진은 다시 그의 손에 들어갔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난 뒤에도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새로운 결과물을 낳고, 그것이 다시 작가에게 돌아온 것이다.
나는 이런 과정을 작품의 되먹임, 피드백(Feedback)이라고 부르고 싶다.
윤동주의 시 「눈 오는 지도」에는 순이가 떠나는 날, 함박눈이 발자국을 덮는 장면이 나온다. 시인은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일 년 열두 달 하냥 자신의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고. 나는 그 구절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삼백예순날 내 연구실에는 하냥 목련이 하얗게 피리라.

실제 목련은 봄에 피었다가 곧 진다. 그러나 그림 속 목련은 계절을 모른다. 선물한 사람의 손을 떠나 내 연구실에 자리 잡은 뒤, 사계절 내내 피어 있다. 그리고 그 목련을 아끼며 보낸 시간은 사진이 되어 다시 작가에게 돌아갔다.
겸재의 그림 속 두 노인은 서로의 시와 그림을 마주 보았다. 오늘날 두 의사는 한 사람의 그림과 다른 사람의 사진을 주고받았다. 한 사람은 그렸고, 다른 한 사람은 그 그림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사진과 글이 생겼다.
작품은 완성되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손을 떠난 뒤 다른 사람의 삶에 들어가 새로운 무언가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처음의 사람에게 돌아갈 때 작품은 또 한 번 완성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