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과정에서 육영수 여사가 숨진 사건을 모티프로 삼는다. 당시 수사당국은 문세광을 저격범으로 지목했다. 영화는 다른 인물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상상한다. 그러자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영화는 사건의 의혹과 배후를 추적하면서도 분명한 결론을 내놓지 않는다. 여러 가설이 있는데, 이를 모두 검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특정한 가설이 곧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비판은 결론을 내리지 않은 극영화를 향해 다큐멘터리의 잣대를 들이댄다.
영화는 해석의 차이다. 똑같은 결말을 보고도 누군가는 어두운 권력을, 누군가는 허술한 수사를, 또 누군가는 진실에 다가가지 못한 무력한 언론을 읽는다. 해석이 다르면 토론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은 토론이 아니다. 제작사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참석과 야외무대인사를 취소했다. 주연 배우의 영화제 토크도 무산됐다. 배우의 집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공공연한 위해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다. 가장 자유로운 토론이 이뤄져야 할 영화제에서도 영화는 자리를 잃었다. 해석과 토론이 실종된 자리에는 낙인만 남게 되었다.
물론 비판의 자유도 존중받아야 한다. 유족의 아픔을 헤아려야 한다는 지적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문제는 방법이다. 일부 장면만 떼어내 의도를 덧씌우고, 영화가 던진 질문과 맥락을 일부러 배제하는 방법은 비평이 아니라 가치의 강요다. 어떤 이야기는 영화가 될 수 있고, 어떤 이야기는 그럴 수 없다는 기준이 그때마다 달라진다면, 피해는 창작 전체로 돌아온다.
극영화가 다큐멘터리와 다르다는 주장은 이번 논란에서 가장 낮은 층위의 방어다. 이런 방어는 곧바로 정치적 반대파의 소재를 찾아내 똑같이 다뤄야 한다는 주장을 불러온다. 박정희를 소재로 삼는다면 노무현도 불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유치하다. 영화 속에 흐르는 맥락을 제거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무엇인지, 왜 52년 전의 사건을 지금 다시 불러내는지 물어야 한다.
영화는 두 겹의 맥락으로 짜여 있다. 첫 번째는 제목이 드러내는 질문, 육영수 여사를 쏜 진범이 누구인가다. ‘암살자’ 뒤에 붙은 괄호 속 ‘들’이라는 표층의 기호가 이 질문을 도발적으로 만든다. 논란은 모두 여기에 쏠려 있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제목이 마침내 가리키고자 하는 심층의 맥락을 더욱 문제 삼는다. ‘암살자(들)’이라는 제목은 그런 맥락으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일 뿐이다.
그것은 1974년이라는 시대다. 저격범이 재일교포이고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사실은 곧장 한일관계의 격랑 속으로 이 사태를 밀어 넣는다. 국교 정상화 이후 9년 만에 두 나라는 외교적 파국 직전에 이른다. 정부는 중화학공업을 앞세운 경제개발에 국가의 명운을 건다. 국민은 성장의 이름으로 침묵을 강요받는다. 긴급조치가 잇따른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이 터져 나온다. 영화가 경찰, 신문사 사회부장, 신입 기자를 주요 인물로 설정한 건 우연이 아니다. 진실을 좇아야 할 언론이 그럴 수 없었던 시대. 바로 그 시대가 영화의 배경이자 주제다.
한일관계, 경제발전, 언론탄압. 시대의 맥락을 제거한 채 제목의 표층에만 매달리면 영화는 “범인을 누구로 암시했나”를 다투는 정치적 퀴즈로 쪼그라든다. 그것은 영화가 던진 질문의 맥락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독법이다. 영화는 “그 시절 우리는 왜 끝까지 질문하지 못했나”를 묻는다. 표층의 기호 아래 흐르는 맥락을 읽어야 큰 그림이 보인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